초기 한국 기독교의 신학은 선교사들에 의해 정립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성향에 따라 교단의 성격이 정해졌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 파송된 선교사들도 파송 국에서 삶과 교리의 편향성을 나타내는 신학교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청교도적 경건주의 신학을 내세웠는데 장로교의 효시가 된 언더우드는 성령운동을 강조하고 복음주의적 신앙을 강조했으며 감리교단의 아펜젤러는 복음의 구원하는 능력, 사죄에 대한 확신과 감격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제대로 된 한국적 신학의 기반이 부족하고 사회참여를 지양하는 교회의 분위기는 정숙주의 신앙을 강조했고 지역 사회에 대한 영향보다는 개인 영혼구원에 치중하였습니다. 또한, 한국 고유의 샤머니즘적 신비주의와 묘한 일치를 이루어 서구의 교회가 국가적 교회적 공동체적 개념인데 반해 한국 교회는 개인의 경건주의 신앙으로 흘렀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처음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이던 1984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의 분위기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경건하고 엄숙하였습니다. 예배 전에 웃고 떠드는 것은 물론 옆 사람과 가볍게 대화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교회에서 사용한 악기는 피아노 한 가지뿐이었고 공예배에서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예배당은 구약의 성소같이 여겨져서 하나님이 임재하는 장소로 생각하고 특히 강대상이 있는 단에는 아무나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주로 권사님 한 분이 먼지를 닦으러 올라가시곤 했습니다. 교회에 있는 집기와 모든 물건은 성물이라고 해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훈련받았지만, 전형적인 성속의 이분법적 교회 공동체를 경험하는 기회였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청년부를 다닐 때 이원론의 문제점에 대해서 같이 공부하고 토론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만큼 심각하게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30여 년 전에도 이런 고민을 했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교회의 이런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점점 심해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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