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누가 선교사인가2020. 3. 16. 19:58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은 선교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복음을 들고 문화의 경계를 넘는 것이며, 또한 사람들을 권하여 예수를 주와 구주로 영접하여 그의 교회의 책임적인 회원이 되게,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전도와 사회정의를 위한 일을 하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선교의 광의의 정의는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하시는 모든 일을 일컫습니다. 협의의 선교는 교회의 타문화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직접적인 사역이나 선교사 파송을 말합니다. 선교사의 기능적 정의는 선교단체에 소속된 정회원이며 모금에 의해 사역과 생활하는 타문화권 사역자입니다.

또한, 선교의 형태에 따라 복음전파와 교회를 세우는 전통적인 선교사와 전문직을 갖고 일과 선교를 병행하는 전문인 선교사뿐만 아니라 비정부 기구 등을 통한 구호활동 등도 선교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선교의 정의에 의하면 타문화권에 나가야 선교라 할 수 있으나 현대는 타문화권이라는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현대 선교의 구호를 ‘From Everywhere To Everywhere’라고 하듯이 선교의 최전선이 지역적인 형태에 더는 머물지 않고 있습니다. 정보기술과 교통이 발달하면서 전 세계가 일일생활권이 되었고 인터넷이 발달함으로 실시간으로 의사소통하는 시대에 어디가 적의 진영이고 어디가 아군의 진영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다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사는 바로 이곳이 가장 시급한 선교지이며 그런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릴 이곳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버지께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의예과, 의학과 6년 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여름, 겨울의 수련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강사님이 선교에 헌신하겠다는 사람은 손을 들거나 앞에 나오라고 청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약속을 지킬 확신이 서질 않아서 한 번도 손을 들지 못했습니다. 본과 4학년이 돼서야 의료선교사가 되어야겠다는 강한 부르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외과를 선택한 것도 선교사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전공의가 되었을 때 선교지에 가 계신 선교사님과 메일을 주고받은 기억이 납니다. 그 내용 중에 한국에서의 삶이 선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그것은 선교가 아니라고 강하게 반박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선배 선교사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통합적 선교를 꿈꾸는 나의 선교철학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나중에 선교훈련을 받고 세계 선교의 흐름을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선교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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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6 누가 선교사인가2020. 3. 16. 19:57

선교 훈련을 다 마칠 즈음에 사역 계획서라는 문서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 것은 사역지에 부임해서 어떻게 선교할 것인가에 대한 청사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문서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료 선교사로서 의료가 낙후된 B 국의 소형 병원에 가서 내가 가진 의료기술을 가지고 이런 방식으로 선교한다면 성공적일 것 같았습니다. 목회학을 공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간 해왔던 제자훈련이나 복음 전도 훈련 등 모든 것이 합력하여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가득해 있었습니다. 이 사역계획서는 선교단체와 파송교회에 제출하였고 이런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1년 동안 마지막 선교훈련을 받으면서 그간 얼마나 협소한 시각을 갖고 있었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통합선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강의도 듣고 삶의 현장에서 살아 있는 교육도 받아서 머리로는 다 아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가슴으로 내려오기까지는 반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고 나서 소중히 간직해왔던 그 문서를 찾아서 찢어 버렸습니다.

도대체 통합선교가 뭐 길래 가치관이 확 변해버렸을까요?

내가 받은 선교훈련에 의하면 전문인 선교는 전문성을 이용해 제자를 택해 세우고 훈련시킨 후 자생 가능한 교회를 개척하는 일로 귀결되는 사역이었습니다. 실제로 2만 명에 육박하는 한국 선교사의 사역 형태중 교회개척과 제자훈련 비중이 61.33%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통합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선교 형태의 문제점은 전문성 자체를 선교로 이해하기 보다는 접촉의 기회나 선교의 도구로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모든 영역을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여 주님의 것으로 드린다는 것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선교지에 이사 가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세계 상황은 선교의 전후방이 사라지고 우리가 속해있는 곳이 바로 선교지라 할 수 있으므로 지금 이곳에서 잘 살아드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선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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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6 누가 선교사인가2020. 3. 16. 19:55

통합선교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이 통합선교를 궁금해 하면서 그게 뭐냐고 묻습니다. 통합선교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통합’이 무엇인가를 설명해야 합니다. 감기가 걸려서 병원에 가면 의사는 환자가 호소하는 각각의 증상에 맞춰 약을 처방합니다. 약을 받아보면 열 내리는 약, 가래 삭이는 약, 소염제, 기침약, 콧물약…. 이런 식으로 구분해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구성요소를 모아놓고 ‘통합’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진정한 통합은 바로 한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감기약을 지었더니 비닐 봉투에 들어있는 물약을 줍니다. 그 안에는 증상을 개선하는 다양한 성분이 들어있겠지만 먹는 사람은 뭐가 뭔지 구분하지 못하고 갈색 물약을 마시게 됩니다. 진정한 통합은 여러 개 구성 요소가 이렇게 하나로 녹아서 한 가지 색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기존 선교가 목사님들이 중심이 되어 복음 증거에 치중되어 있다면 통합선교는 다양한 형태의 전문성이 가미되어 삶의 전 영역을 다루는 선교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양약을 먹든지 한약을 먹든지 병이 나아야 합니다. 병이 나아야 한다는 목표는 훼손되지 않고 어떤 일을 하든지 일관된 방향성을 가져야 합니다. 통합선교의 목표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Missio Dei라는 말은 1934년 칼 하르텐슈타인(Karl Hartenstein)이라는 독일의 선교신학자가 주창한 개념으로 1952년 윌링겐(Willingen)에서 열린 에큐메니칼 진영의 세계선교협의회(IMC)에서 채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에큐메니칼 진영의 견해는 선교는 하나님께서 세계 속에서 하시는 모든 것을 말한다는 것이었고, 복음주의 진영은 이 용어를 삼위의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더 진정한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녹아서 내 모습이 드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 사역에 의료 사역을 더했기 때문에 통합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지역사회 개발이라는 도구로 선교를 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통합선교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통합의 정도는 스펙트럼을 가집니다. 통합은 마치 우리의 삶이 성화되어 가듯이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써서 조금씩 이뤄가야 할 과제입니다.

선교훈련을 받고 나서 선교지가 결정되게 되면 파송하는 교회와 더불어 사역계획에 대해 논의하게 됩니다. 많은 선교사가 일 중심의 계획들을 세우게 되며 선교지에서 감당해야 할 일들을 결정합니다. 통합선교의 관점에서 보면 선교사들이 빠질 수 있는 중대한 오류를 쉽게 찾아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선교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업적이 아니라 선교지의 사람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격체이며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교의 주체이시라는 Missio Dei를 선교 현장에서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어떠한 일보다 앞서는 것은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듯이 그들의 고통받는 현실에 공감하고 그 삶 전체를 주님 구속의 역사 아래에 놓이도록 돕는 일이 바로 통합선교입니다.

통합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여러 가지 구성요소를 모아놓기만 하면 통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일하는 병원도 통합의학센터를 수년 전에 출범하고 통합의학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환자의 육신을 돌볼 뿐 아니라 영혼과 마음을 돌보는 일에는 구성원 모두가 같은 강도의 부담감과 책임의식을 갖고 대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하지만 통합의학을 한다는 많은 센터가 양방과 한방이 같이 있다거나 양방의 현대의학에 덧붙여 보완대체의학을 같이 하는 것을 통합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물론 팀원 각자의 고유한 역할이 있기는 하지만 환자 전인의 회복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이루려는 노력은 모두가 다 같이 해야 합니다. 목사는 복음을 전하고 영적으로 돌보고 상담가가 마음의 치유를 감당할 것이기 때문에 의사는 육신의 병만 잘 돌보면 된다는 식의 사고는 진정한 통합이라 볼 수 없습니다. 또 치유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빼놓고는 통합적 치료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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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6 누가 선교사인가2020. 3. 16. 19:54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는 전통적으로 복음 전도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1966년 휘튼에서 열린 교회의 세계선교에 관한 회의에서 구원, 전도는 무시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책임과 참여를 촉구하였습니다. 1974년 로잔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를 개최하면서 당면한 에큐메니칼 선교 신학의 도전에 반응하는 복음주의 선교 신학을 정립하게 됩니다. 이 대회에서 존 스토트는 선교, 복음전도, 대화, 구원, 그리고 회심과 같은 용어들의 성서적 주석을 에큐메니칼 그룹의 사용과 구분 지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선교’를 복음전도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양자를 다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재해석하였습니다.

통합의 관점에서 보면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를 두 개의 요소로 인지하는 것조차도 이분법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 전도를 하는 것이 사회 참여의 형태로 나타나야 하고 사회 참여를 통해 복음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두 가지 개념이 결국 같은 것이며 하나의 요소에 다른 요소가 내포되어 있어서 구분하기 힘든 선교가 통합선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역사회 개발을 하는 많은 NGO(무정부 기구) 단체들은 빵을 주는 것이 선교라고 하고 전통적인 교회개척, 제자훈련을 하는 목회자 출신의 선교사들은 복음이면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선교지에 알맞은 선교전략을 세워서 효율적인 선교를 하려면 각각의 상황에 맞게 다른 모습을 가져야 할 것에는 이견이 없으나 선교의 본래 정신을 훼손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서로 ‘빵이 먼저다.’, ‘복음이 먼저다.’라고 논쟁을 벌이기도 하는데, 이렇게 어느 한쪽의 극단으로 치우치기보다는 빵을 주면서 복음을 드러내고, 복음을 증거하면서 빵을 나눠주면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존중함으로 ‘하나님의 선교’의 자원으로 서로 연합하고 힘을 합치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서구의 NGO들이 후원금 대부분을 사무실 운영경비로 쓴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OECD에 가입하면서 많은 재원을 다른 나라를 위해 쓰고 있는데, 이 자금을 둘러싸고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단체가 존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초심을 잃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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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6 누가 선교사인가2020. 3. 16. 19:53

기독교의 핵심 원리인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모든 조건에서 인간과 같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선교의 중요한 원리로서 성육신의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선교지에 가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처럼 현지인들에게 강자와 가진 자로서 그들 위에 서지 말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선교사가 선교적 의미의 성육신을 그 사람들과 비슷하게 수염을 기르거나 옷을 입고 그들의 언어를 배우는 정도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나님이신데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과 우리가 선교지의 원주민들과 비슷한 상황에 부닥치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신 것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것을 흉내 내서 우리가 그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낮아지겠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교만일지도 모릅니다. 선교사들이 성육신적 삶을 표방하면서도 현지인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고 그들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면서 그들 위에서 군림하곤 합니다. 자신들은 축복받은 민족이고 그들은 저주를 받은 족속이라고 생각하며 이런 차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면서 선심을 쓰듯이 그들 앞에서 음식을 같이 먹고 비슷한 외모나 옷을 추구하며 그것이 대단한 성육신적 선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육신은 낮아짐의 의미도 있지만 같아짐의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녀로서의 권위와 모든 복락을 그들도 똑같이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들의 구원에 우리가 참여하는 일은 실천 가능한 성육신이 될 것입니다. 열등한 존재로 여겨 평생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진정한 성육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반복적인 죄를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칭하시고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그 호의가 그들에게도 똑같이 베풀어져야 합니다.

더 앞선 성육신의 개념은 ‘올림’입니다. 상대방을 나보다 더 존귀한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에게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교훈을 얻고 하나님이 날 사랑하셔서 보내주신 귀한 선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은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어떤 의미 있는 존재로서 주님이 허락하신 사람들입니다. 광야에 있던 요한이 예수님이 흥하여야 하겠다고 고백했듯이 우리도 그들이 더 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해달라고 복을 빌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은 성육신을 설명할 때 우산의 비유를 드시곤 하십니다. 성육신은 비가 오는데 비 맞는 사람과 같이 우산을 쓰고 가는 것이 아니라 우산을 버리고 같이 비를 맞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산이 좋은 것을 알지만, 그들과 같아지기 위해 기꺼이 비를 맞을 마음을 갖는 것이 진정한 낮아짐이라는 말입니다.

학생 여름 수련회 때 다미안 신부에 대한 연극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콩트였지만 깊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 환자 격리지역인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 들어가 그들과 16년 동안 동고동락한 최초의 백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지 않아 환자의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주님, 저에게도 같은 나병을 허락하시어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고 손가락이 없는 사람의 고름을 자신의 손을 짜주었습니다. 결국, 자신도 나병에 걸렸고 마흔아홉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우리가 손해를 보지 않고 남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흉내는 낼 수 있어도 능력이 드러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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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6 누가 선교사인가2020. 3. 16. 19:52

한 교회에 이틀간 선교 집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첫째 날은 미국의 유명한 대학의 박사학위를 받고서 선교사가 되어 선교지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선교사가 오기로 되어 있었고, 둘째 날은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직장에서 늘 모범을 보이며 올바른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 한 자매가 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이틀 중에 하루만 참석해야 한다면 누구의 집회에 가겠습니까?
십중팔구는 첫째 날의 집회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하나님의 선교를 잘 감당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 교회에 편만하게 펼쳐진 성공 주의는 선교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소위 성공을 한 사람이 선교하면 많이 내려놓은 것으로 인정되어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게 됩니다. 편하게 갈 수도 있는데 더 많이 내려놓았기 때문에 헌신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라면 모든 사람을 그 선교에 최적화되도록 사람들을 배치하고 사용하실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영향력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사람도 너무 귀하게 쓰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섣불리 그 각자의 역할을 판단하거나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두실만하니까 두시는 것이고 보실만하니까 지켜보시는 것인데 무슨 큰 잘못이나 한 것처럼 추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각자에게 맡긴 고유한 역할을 기억하면서, 서로 존중하고 서로의 연합 가운데 하나님의 선교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지체들이 서로 상합하고 연락하여 만들어지는 교회에서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더 요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경력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가에 대한 것입니다. 모두가 선교지로 나갈 수는 없으며 누군가는 파송된 선교사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누군가는 선교사를 후원하기 위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생산 활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 모든 사람의 역할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하나님의 선교’라는 작품으로 만들어집니다.

선교지로 나가기 전에 후원 교회를 연결하기 위해 몇 교회를 다니며 제 소개를 하였는데, 어디를 가나 목사님과 성도들이 나에게 던진 말은 항상 같았습니다. 잘 나가던 외과 의사라는 직업을 관두고 선교사가 되었으니 대단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호의에 감사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내가 의사라서 더 가치를 매겨주는 것 같은 분위기는 매번 나를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내가 가진 고유한 최고의 가치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비교적 높은 사회적 신분에 대한 대우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2만 명의 선교사들이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데, 그분들의 헌신을 귀하게 여기고 우리가 도울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협력해야겠습니다.

Posted by 소겸
6 누가 선교사인가2020. 3. 16. 19:51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이런 직업을 주셨을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직업이 생계유지를 위한 밥벌이 수단이나 전문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쯤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이 직업을 통합의 관점에서 보면 아래와 같은 스펙트럼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중국에서 사역하는 한 선교사는 본인의 신분을 위장하고 안정적인 거주를 위해 중국 진출 한인 기업의 부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사역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경우는 직업을 위장의 도구로 쓰는 것입니다. 어떤 선교사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음식을 나눠주거나, 무료 진료소를 열어서 환자를 치료해주기도 하는데 이것은 접촉의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전문성을 갖고 선교를 하면서 하나님 사랑의 통로로 사용한다면 이것은 더 통합적인 선교가 될 것입니다. 통합의 최고의 경지는 절대 진리의 증거입니다. 자기 일이 복음으로 드러난다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요즘 전문인 선교가 주목 받으면서 BAM(Business As Mission)이라는 개념이 유명해지고 있습니다. 방선기 목사는 BAM은 전문인 선교에 비해서 선교 지역에 경제적인 면에서 더 기여하는 바가 많으며 특히 선교지에서 일자리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 전문인 선교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할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위에서 말한 위장의 도구는 BFM(Business For Mission)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뢰성에 오점을 남길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는 실제적인 이익을 내야하고 탁월함을 추구하며 책임성이 따라야 합니다. 선교에서 직업의 통합적 스펙트럼은 선교냐 아니냐의 차원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로 나타나므로 우리의 직업이 절대 진리의 증거의 방향으로 변해가도록 항상 염두에 두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합법적으로 선교지에 거주하는 방법은 학생 신분으로 공부를 계속하거나 회사에 취직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서 안정적인 비자 발급 과정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머물 수 있어서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사역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자를 발급받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만 합니다. 태권도 도장을 열거나 상점을 열기도 하고 학교를 세워 학생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니 선교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하는데 그 에너지가 분산되기 마련입니다. 심지어 어떤 선교사는 아예 선교사를 사임하고 현지에서 사업하는 분도 있습니다. 선교후원으로 조금씩 마련한 자산이 불어서 현지의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교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모든 사역이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게 드려지기 위해서 통합의 스펙트럼을 오른쪽 절대 진리의 증거 쪽으로 옮기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Posted by 소겸
6 누가 선교사인가2020. 3. 16. 19:49

통합에 대한 이해가 있었던 후로 삶의 전 영역에 큰 변화가 왔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여전해 보이겠지만, 그 내면의 변화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수술하기 전날에는 늘 다시 한 번 교과서를 펴보고 최근의 치료 경향에 대해 논문을 읽곤 했습니다. 그 환자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치료를 해주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예로 수백 명의 급성충수염 환자의 상처 감염률이 1% 내외였었는데 거의 전무후무한 기록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결과였습니다. 치료를 잘 받고 퇴원하는 환자들이 고맙다고 할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십 분의 시간을 주신다면 좋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대부분 환자는 컴퓨터에 들어있는 다리예화 그림을 보면서 복음을 제시받았고 그중 많은 분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통합선교를 접하고 나서 눈에 보이는 저의 진료 패턴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의료 행위 자체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되기를 바라면서 더 진심으로 환자를 대하게 되었습니다. 직업은 세상의 한 가지 도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 영역입니다. 무질서, 타락, 죄, 질병, 고통, 모든 어그러짐 가운데 있는 사람과 모든 피조물이 회복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의료는 단순히 질병에 대한 돌봄이 아니라 전인격의 회복과 치유를 도움으로 구원에 이르는 연속선상에 있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화상 환자를 치료하면서 날마다 돋아나는 새 살을 보면서 거기에도 하나님의 구속하심(구원)이 존재함을 느꼈습니다. 소독약만 몇 번 발라줬는데 일주일이 지나 실밥을 뽑으니 말끔하게 붙어 있는 상처를 보면서 거기에서도 완성을 향해 가는 구원의 단계들을 보았습니다.

여기 제시한 의료 말고도 어떤 직업이든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공사장에서 하는 허드렛일부터 고위직으로 정치하거나 법관으로 일하는 것까지 모두 구속되어야 하며 복음의 메시지로 드러나야 합니다.

심한 담낭염으로 개복수술을 받은 환자분이 있으셨습니다. 웬만하면 복강경으로 수술할 텐데, 너무 심해서 하는 수 없이 개복했던 분입니다. 당뇨, 고혈압 등 만성질환이 있으셔서 상처가 잘 나을 것을 염려하기도 했는데, 봉합해놓은 상처가 한 열흘 후에 붙지 않고 다 벌어졌습니다. 병동에서 난리가 났다고 연락이 와서 올라가 보니, 아들이 와서 차트를 집어던지고 욕지거리가 난무했습니다. 그 험악한 상황에서 그 보호자의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모욕적인 말도 들어가며 마음을 달래줘 가며 두 주 정도 잘 치료하여 상처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 아들이 나에게 찾아와서 ‘이제부터는 선생님을 봐서라도 더 열심히 살아보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환자의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많은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도리어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성심껏 치료해드린 것이 그 아들에게도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Posted by 소겸
6 누가 선교사인가2020. 3. 16. 19:48

모 선교단체에서 출판된 ‘보내는 선교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가는 선교사가 있고 보내는 선교사가 있는데 보내는 선교사는 격려, 물자, 재정, 기도, 연락, 귀환 후원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성도들을 격려해 ‘무릎 선교사’를 세우는 프로그램을 하기도 했습니다. 선교를 이렇게 다양한 구성원들이 힘을 합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자칫 잘못하면 빠질 수 있는 오류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이 개념에 의하면 우리가 선교 현장에 직접 갈 수가 없어서 대신 여러 가지 형태로 선교사를 돕는 일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선교에 동참하자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가는 선교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했으니 대단한 선교이고, 이곳에서 직장에 다니면서 편안하게 신앙생활 하며 선교를 돕는 ‘보내는 선교사’는 덜 귀한 선교사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주적인 교회의 개념을 설명할 때 교회의 지체는 비록 작을지라도 귀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간에 함께 하는 모든 일은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가 있습니다. 도리어 가는 선교사는 보내는 선교사와 교회의 도움으로 선교지에서 선교할 수 있으니 그들에게 큰 감사들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의 헌신을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나가 있기 때문에 더 큰 헌신을 드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들에게는 특별한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이곳에 머무는 사람에 대해 보상심리를 가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각자의 고유한 역할이 있는 것이고 그 역할은 주님 보시기에 너무나 값진 것인데 우리가 굳이 서열을 정하고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통합선교는 도리어 삶의 현장이 선교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가는 선교사는 그 땅에 이사 가서 사는 것이 선교이며, 보내는 선교사는 이곳에서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선교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세계를 품고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선교에 대한 그들의 역량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이렇게 선교사를 ‘가는’과 ‘보내는’으로 꼭 나눠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선교사 앞에 다양한 단어를 붙여 ‘○○○ 선교사’로 부르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일종의 마케팅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는 아니겠지만, 대중에게 선교의식을 고취한 결과로 교회와 선교단체로 더 많은 후원과 관심을 이끌어 내게 되고, 성도들에게는 선교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주는 꼴이 돼버립니다. 성도가 감당해야 하는 선교는 신앙의 일부 정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삶 전부가 선교적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비전을 물어보면 대개는 선교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심지어는 선교를 교회 성장을 위해 좋은 아이템으로 활용하는 교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으면서 몸부림치는 교회도 있지만, 성도들에게 선교를 강조함으로 그들의 관심과 더 많은 헌신을 끌어내고 그 결과로 교회의 부피가 커지는 쪽으로 방향성을 갖는다면 선교를 하였다기보다는 선교를 활용했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Posted by 소겸
6 누가 선교사인가2020. 3. 16. 19:4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문화 명령(Cultural commission)과 지상 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8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19~20

명령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로 부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명령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문화 명령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노아에게도 명령하셨고 지금까지도 지속하는 하나님의 요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이 명령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완전하게 성취될 수 있는 대 명령이라고 했습니다.

지상 명령은 선교의 현장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선교의 현장은 타문화 지역뿐만 아니라 가정, 학교, 교회, 일터 등 다양한 일상의 무대를 포함하며 우리와 다른 세대 또한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정보 통신이 발달하면서 전 세계가 일일생활권이 되고 실시간으로 어디서나 메시지를 주고받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선교의 전후방을 따지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단일 민족을 자랑하던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외국인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이제는 다문화 국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슬람 교인들을 만나기 위해 외국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쉽게 주변에서 만날 수 있으며 이미 십여 곳의 이슬람 종교시설이 들어섰습니다. 세대 간의 격차 또한 선교의 대상입니다. 젊은 세대의 언어와 문화는 다분히 이질적이어서 타문화라고 할 만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선교지에 살고 있습니다. 선교는 신학대학을 나와서 목사 안수를 받고 타문화 지역에 가서 교회를 세우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선교사이길 원하고 계시며 지상 명령에 순종함으로 곳곳에서 주의 제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지길 소원하고 계십니다.

인턴 시절 파견근무 때부터 알고 지내는 한 간호사 선생님은 나의 믿음의 동역자입니다. 가끔 연락할 일이 있어서 통화하면 나에 대해 깍듯하게 ‘선교사님’이라는 호칭을 써줍니다. 그리고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를 늘 부탁하곤 합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은 나를 선교사로 부르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다른 성도에 비해 다른 것이 별로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평범한 직장인이고 다섯 아이의 아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주 적은 선교 관련 일을 한다고 아직도 선교사로 불리는 것은 나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모든 성도는 다 선교사라고 외치면서 내가 선교사가 아니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또 성도들과 별다를 바 없는 내가 선교사이듯이 여러분도 선교사로 사셔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좋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선교사로 부를 때마다 나는 절로 나의 사명을 자각하고 내 삶이 더 선교적이 되기를 애쓰게 됩니다. 선교사라 불리는 그 이름에 걸맞게 진짜 선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Posted by 소겸
6 누가 선교사인가2020. 3. 16. 19:45

하루에도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갑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 나름의 삶을 영위하고 있고 뭔가를 열심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을 어떻게 바라 보냐 하는 것은 우리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최첨단 무전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세상에 한 대뿐이라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물건이 될 것입니다. 그 무전기가 가치를 발휘하려면 어딘가에 다른 무전기가 있어야 하고 그 기계를 사용해서 서로 대화를 나눌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신분을 주셨는데 그 신분이 제 가치를 드러낼 때는 신분이 천한 사람 가운데 있을 때가 아니라, 나보다 더 값져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내가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고귀합니다. 그들이 고귀하다고 느껴질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나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나만큼이나 그들을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고 계시며 지금도 마음 아파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선물이어서 비록 내가 그들을 돕는 처지에 있을지라도 그것이 그들을 위한 나의 섬김이 아니라,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사입니다. 그 사랑과 긍휼함으로 그들을 대하는데 어찌 가장 귀한 선물인 복음이 전해지지 않겠습니까? 이 기본이 우리 삶에 실천된다면 선교는 저절로 될 것입니다.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내가 길을 걷고 있는데 주변에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람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다 구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 지나갈 때는 특별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경험되었습니다. 순간 로마서 8장 26절의 말할 수 없는 탄식(groaning)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마음이 저리고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간절함으로 그 사람들에게 하소연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때문에 너무 아파하세요. 제발 예수님을 믿으세요! 당신은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선교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볼 수 있는 사람이며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들을 품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는 날 동안 바로 우리가 이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Posted by 소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