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나님과 친하다2020. 3. 17. 12:17

얼마 전에 어떤 분이 ‘하나님과 친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친하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가까이 사귀어 정이 깊다는 것입니다. 상대와 친하려면 우선 가까이 있어야 하고 서로 오고 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3:16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3:24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길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그 안에는 성령님이 계시며 예수님께서도 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우주 공간에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내 곁에 계시며 내 안에 거하고 계신 분이니 어찌 그분과 친하지 않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친하다는 것은 친하냐 안 친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친한데 ‘얼마나 친한가’의 정도가 중요한 관건입니다. 하나님과 친한 사람은 서로가 긴밀한 교통을 합니다. 어느 때나 어느 장소에든지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함으로써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과 동행합니다. 그리고 혼자서 결정하지 않고 먼저 주님의 뜻을 겸손히 물으며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철저히 순종합니다. 범사에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과 지금보다 더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고 애쓰는 삶이 바로 성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술하다 보면 결정을 해야 할 순간들이 많습니다. 더 진행할지 그만할지, 잘라야 할지 놔둘지, 어떤 방향으로 접근해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연결할지, 무슨 실을 사용할지……. 아무리 경험이 많은 의사라도 수시로 이런 결정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특히 어려운 결정의 순간에는 두렵고 떨리기도 합니다. 한번은 동료의사가 수술 중 수술부위의 지혈이 안 된다고 나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부랴부랴 올라가서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그 의사는 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실신하여 쓰러졌습니다.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 어려운 순간마다 한숨같이 흘러나오는 소리는 주님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내 연약함과 무능함을 느끼는 순간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주님은 늘 바로 옆에 계셨습니다.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낸다는 것은 더할 나위가 없는 은혜입니다. 로렌스 형제가 주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것처럼 삶의 터전에서 주님과의 친밀함을 더 드러낼 수 있기를 소원해봅니다.

북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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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2 하나님과 친하다2020. 3. 17. 12:16

하나님을 안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단어는 ‘야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총 944군데에 쓰였는데 그 뜻이 다양합니다. 그것들은 인지하다, 경험하다, 구별하다, 배워서 알다, 어떤 사람을 알다, 관계하다, 성적 관계를 갖다,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 등입니다. 창세기 4장 1절에서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였다는 단어가 ‘야다’라는 것을 알고 의아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히브리인들이 누구를 안다고 표현하는 말은 이성과 논리로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삶과 경험을 통해 마치 부부가 동침하듯이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것을 안다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친숙한 관계를 맺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됨을 이해하고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안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머리로 이해하려 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해하다(understand)’라는 단어가 아니라 ‘알다(know)’라는 단어가 쓰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대 그리스 사람들처럼 지식과 형이상학적 본질을 따지면서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그 관계가 형성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해도 그분의 존재와 하시는 일을 인정해드리고 태초에 형성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가능해질 것입니다.

대학 1학년 때 캠퍼스에서 우연히 알게 된 형과 몇 개월 동안 창세기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교회만 다녔지 신앙의 깊이가 거의 없었던 때였는데, 공부할수록 더 많은 궁금증이 쌓여갔습니다. 만날 때마다 꼬치꼬치 캐묻는 나의 질문에 다 대답하기는 늘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때 그 형이 나에게 알려준 말이 인상 깊었는데 ‘하나님을 이해(understand)하려 하지 말고 알아(know)가라’고 한 말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0.999999…… 는 1과 같다고 하시길레 ‘그건 분명 1에서 조금 모자란데 어떻게 1입니까?’라고 따져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극한이니 무한이니 이런 개념을 모르는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교무실로 나를 부른 선생님은 나중에 알게 될 테니 지금은 그렇게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마치 부부가 동침하는 것과 같은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비록 이해하지 못한다고 부정하기보다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자세로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알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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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2 하나님과 친하다2020. 3. 17. 12:16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에게 주신 복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모든 것이 풍족하여 부족함이 없는 것, 내가 겪는 어려운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 그리고 남이 가질 수 없는 것을 누리는 것 등을 복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복은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수년 전에 퇴근하면서 우연히 극동방송에서 나오는 한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그 교회의 장로님을 형통하게 하셨고 최근에 아파트 평수가 넓은 곳으로 이사했을 뿐 아니라 차도 좋은 차로 바꾸었고 자녀도 복을 주셔서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설교를 들은 많은 분은 하나님을 믿을 때 받는 복이 이런 것들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의문을 한번 가져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너무 선한 삶을 살고 있는데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사회의 저변 층인 사람과 온갖 나쁜 짓을 일삼고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삶을 사는데도 온갖 재물과 명예를 다 누리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누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까?

그 목사님의 설교대로라면 누가 과연 복을 받은 사람인지 알 수가 없게 됩니다. 한국인의 정서에는 기복주의, 성공 주의 등이 삶에 배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특성이 고스란히 교회에도 반영되어 진정한 하나님의 복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복에 관한 대표적인 성경 구절로 시편 1편과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들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1:1

시편 1편의 복은 히브리어로 ‘에쉐르’인데 이것은 ‘아솨르’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구약에서는 복을 의미하는 히브리어가 ‘바라크’와 ‘아솨르’가 있습니다. 바라크는 415회 사용되었는데 주로 하나님이 누군가를 축복할 때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었거나 신적 권위를 가진 대리인에 의한 축복선포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바라크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로 인간의 선행에 관계없이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산업, 육체, 후손에 내려주는 복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아솨르는 44회가 사용되었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안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 대한 보상으로 내리는 복에 대해 인간이 고백 또는 기원하는 형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70인역에서는 마카리오스로 번역되었는데 이 단어의 특징은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를 통해 오는 특이한 즐거움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시편 1편에서 언급된 복은 하나님 나라의 복을 예표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예함으로 성도가 누리는 복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은 5장 1절~12절과 누가복음 6장 20절~23절에 쓰여 있는 산상수훈에 나오는 복은 위에서 설명한 마카리오스입니다. 마태복음의 복은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육체적 안락을 넘어 하나님 자녀로서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종합해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질과 건강의 축복을 받는 것이 안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 구해야 할 최우선 순위의 복은 하나님과 얼마나 친해지는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모든 것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우리 형제들은 5남매인데 그 직업이 각각 목사, 전도사, KAIST 출신의 과학자, 두 명의 의사입니다. 미혼 시절 잠시 교회를 다니셨었는데 생활고에 시달리시면서 수십 년간 교회에 발걸음을 끊었다가 다시 믿기 시작한 어머니와 어머니의 전도로 최근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신 아버님에게 자녀들은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주 깊은 산골에서 자라난 광부의 자녀들이 이렇게 장성해졌으니, 사람들은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자녀들이 하나같이 잘 되었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정말 부러워해야 할 것은 좋은 직업이 아니라, 믿음으로 세워진 가정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부러워해야할 가치를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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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2 하나님과 친하다2020. 3. 17. 12:15

올바른 신앙을 갖고 있으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 많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결코 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관점에서 봤을 때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주님 품에 돌아갔을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우주의 주인 되신 분의 상속자에게 무엇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8:16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요16:15

마태복음 6장에서는 우리가 구해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가장 정확히 알고 계신 분이며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주실 수 있는 풍족함이 있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과 친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우리 삶의 모든 필요를 채우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1~33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고 나서 꿈에 여호와가 나타나셔서 무엇을 줄지 구하라 하였을 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대답하며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시고 전무후무한 지혜뿐만이 아니라 구하지도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함께 주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을 잘 구한다면 나머지도 하나님 아버지 상속자의 격에 걸맞게 넉넉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교회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수학 시험을 보다가 백 점을 맞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신에 반영되는 중요한 시험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는지 정말 백 점을 맞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기도를 하지는 않습니다. 나에게는 다섯 명의 자녀가 있는데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게 해달라거나 반에서 1등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품이 좋은 아이로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합니다. 솔로몬이 부귀영화를 구하는 대신에 지혜만을 구하였음에도 모든 것을 누렸듯이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에 급급해하기보다는 더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고 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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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과 친하다2020. 3. 17. 12:15

우리가 얻기를 소망하는 복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공적에 따라 하늘의 상급을 주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2~3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3:14

상급을 원어로 보면 크게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대가로서 주어지는 것으로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우리가 아는 상의 의미로 좋은 것을 말합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22:12

여기에서 나오는 상은 미스도스를 말합니다. 행위에 따라 다른 보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상은 꼭 좋은 것만은 아닌데 가룟 유다가 죽을 때 받은 불의의 삯이 미스도스였습니다.

하늘에 상급이 있는 것은 당연하고 이 땅의 상도 중요하며 이것들이 우리를 위로해준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늘의 상이 하도 크고 비교도 안 될 만큼 귀함을 알아 이 땅에서 받는 상에 대해 간절히 바라는 것을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은 도리어 반대가 되어서 하늘의 상을 가볍게 여기곤 하는데 이는 물질주의의 만연으로 말미암은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찌 이 땅에서 받는 것만을 만족해하며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도리어 이 땅의 삶을 십자가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고난을 즐거워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이 상은 우리가 꼭 받기를 힘써야 하는 명령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안 받고 말자는 것은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굳은 의지로 그 상을 사모하고 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땅의 생을 마감하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때 이 땅에서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이 상밖에 없습니다. 그 상의 진가는 우리가 그곳에 거하게 되었을 때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 추측하고 이해하는 것 이상의 놀라운 상의 위력을 경험하고 나면 이전에 이 상을 위해 더 노력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후회할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병원 생활을 하면서 선교 부문과 연구 부문에서 공적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많은 직원 앞에 나가서 트로피를 받는다는 것이 멋쩍은 일이긴 하지만 전체 직원을 대표로 그런 상을 받는다는 것이 영광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년이 지난 지금은 아마도 내가 그런 상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받는 상은 이 땅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며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상의 소중함을 알아서 그걸 받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는 모습을 더 많이 지니고 싶습니다. 내가 하늘의 상을 받는 것에 대해 욕심을 아무리 많이 부린다 해도 누구도 나에게 이기적이라거나 욕심이 많다고 비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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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과 친하다2020. 3. 17. 12:14

신약 성경에 언급된 면류관은 경기에서 이긴 사람에게 주는 승리의 면류관인 스데파노스 입니다. 우리가 써야 할 면류관은 일생에 딱 한 번 주어집니다. 바로 영원한 나라에 다다랐을 때 예수님의 판정에 따라 그동안 모아둔 상급에 걸맞게 우리 머리 위에 씌워 주실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경주와도 같습니다. 싸움과도 같은 이 경주가 끝나면 시상식이 있을 것인데 그때 영광의 금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천국에 가기만 하면 됐지 꼭 금 면류관을 써야 하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하지만 그 영광에 참예하는 기쁨은 맛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대단한 것입니다. 이 상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그 상을 많이 사모하였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3:14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은사들과 재능을 주셨습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장차 받게 될 상과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믿음을 잘 지키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분과의 동행을 원하는 데에 이런 것들이 없다면 너무 힘들므로 우리를 배려하시기 위해 그것들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만 특별히 사랑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상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보시는 관점은 이 사람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가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가 이해하는 수준의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으십니다.

중국 상해에 HIFU라는 암 치료기 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 담당 교수님은 인자하시면서 환자를 잘 치료하기로 소문난 분이었습니다. 치료실에 들어갔을 때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노란 깃발들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치료받은 환자들이 잘 치료해주신 것에 대해 고마워하면서 존경의 표시로 하나하나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교수의 권위는 그 깃발들만 봐도 알만했습니다. 그것들은 그 교수의 면류관과도 같은 것이었으며 그런 경지에 이른 것이 부럽게 느껴졌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주의 성도들이 빛나는 금면류관을 쓰고 거니는데, 혼자서만 빵떡 모자를 쓰고 다닌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천국에 있다는 것 자체가 감격스러운 일이겠지만, 영광의 면류관이 내 머리 위에 얹혀져 있다면 더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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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 누군가가 나의 수고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이를 알아보고 칭찬해준다면 우쭐해지고 기분이 좋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실망할 것이 없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정확히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행위를 정확히 평가하셔서 공평하고도 부족함이 없는 상을 주실 것입니다.

천국에는 상대적 빈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분량에 따라 주어진 상은 부러움이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찬송 돌리는 예배의 모습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비교 자체가 없어서 자신이 누리는 것들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감사만 드릴 것입니다.

남을 칭찬하게 되면 상대방이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좋은 미사여구를 붙여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표현할 수 없음에도 우리의 얇은 귀는 한없는 교만으로 치닫는 수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인사는 그 수고를 하나님께서 좋은 상으로 갚아주실 것이라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듣기 좋은 말보다 훨씬 더 복된 칭찬이 될 것입니다.

칭찬을 받은 사람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답하는 게 좋습니다. 잘못하면 주님께 돌려져야 할 영광을 가로채서 하늘나라의 상을 잃을 수도 있어서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17:10

예전에 어떤 강사님이 훌륭하게 강의를 마치고 나서 담임 목사님이 청중에게 강사님께 큰 박수를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나자 그 분은 두 손을 올려 하늘로 향하는 제스처를 보이셨습니다. 평소에 잘 알고 계시던 분이시라서 나는 금방 그 행동의 의미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칭찬을 듣고 나서 ‘뭐 그런 걸 갖고 다 그러시냐?’고 반문하듯이 대답하면 도리어 교만한 자세일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칭찬 들을 사람이 그 상을 잃지 않도록 지혜롭게 말한다면 서로에게 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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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2 하나님과 친하다2020. 3. 17. 12:12

‘침노를 당하다.’의 원어는 비아제타이입니다. 이는 강력한 힘을 소유한 자에게 강탈당하거나 거칠게 다루어져 강제로 점령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이라는 단어에 걸맞지 않은 거친 표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11:12

하나님이 개인에게 붙여주신 모든 환경과 사람들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해석을 하면 너무 이기적이 아니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침노를 당한다는 ‘비아제타이’는 ‘열정적인 신앙인들에 의해 빼앗아지는 또는 수용되는’ 정도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거룩한 능력과 막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땅에 기습적으로 도래한 천국은 단지 침략과 약탈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역동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열림으로써 열정적 신앙인들을 수용하게 된 것입니다.

침노하는 자는 목적한 바를 쟁취하기 위해 결사적인 노력과 지혜를 아끼지 않는 강하고 용기 있는 자를 말합니다. 빼앗는다는 것은 천국의 유업을 얻으려고 온 정열로써 애쓰며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말합니다. 천국을 얻으려고 우리 선진들은 생명을 바쳐야 했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수치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죽기살기식의 단호한 결단과 용기로서 천국을 차지하기를 애써야 합니다.

어느 날 한 아버지가 그의 열 자녀에게 나눠주려고 열 개의 사과를 갖고 오셨습니다. 사과를 한 개씩 받아먹으면 공평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만한데 한 아이가 아버지한테 대뜸 그 열 개의 사과를 다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관점으로 보면 이 아이는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 때문에 아홉 명의 아이가 사과를 못 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 아이가 원하는 대로 그에게는 열 개의 사과를 주고 나머지 아이들에게는 예정했던 대로 한 개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이해가 안 될지 모르지만, 부요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열 개를 준비해오셨지만, 그 자리에서 아홉 개의 사과를 추가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너무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열 개를 다 달라고 했던 아이만 많은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에 의해서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것은 결코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대다수 사람에게 그럴만한 열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과 대학 본과에 재학 중일 때 함께 몰려다니며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던 형제,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그 멤버 중에는 목사가 된 분도 선교사가 된 분도 있습니다. 한번은 수련회로 모여 말씀을 듣고 있는데, 한 형제가 ‘아멘’을 외치면서 재빠르게 바닥에 십자가를 긋는 행동을 반복했습니다. 나중에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그 말씀이 자기 것이 되게 해달라고 찜을 하느라고 그렇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나서 하는 그 행동이 눈에 거슬리기도 하고 얄밉게도 보였는데, 설명을 듣고 보니 그의 행동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부요하신 하나님이 침노하는 자에게 베푸실 은혜는 한량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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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2 하나님과 친하다2020. 3. 17. 12:12

새벽 기도회나 금요 철야 기도회 같은 데를 가보면 일부러 들으려는 것은 아니더라도 주변에 앉으신 분들이 무슨 내용으로 기도하고 있는지를 종종 듣게 됩니다. 자녀의 학업문제, 남편의 직장문제, 건강 문제, 돈에 얽힌 문제, 다른 사람과의 갈등 등 다양한 제목을 갖고 기도를 드립니다.

무엇무엇을 달라는 기도는 어린아이의 기도와 같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부모에게 달라고 합니다. 배고프면 먹을 것을 추우면 입을 것을 요구합니다. 부모는 형편이 어렵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어린 자녀를 위해 부족함 없이 채워주려고 노력합니다. 제철도 아닌데 포도를 달라고 하면 외산 포도라도 가져다줄 것이며 그것도 없다면 건포도라도 구해다 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님이 귀한 것을 구해오시면 당신들은 별생각 없다고 하시면서 자녀들에게 먼저 먹이고 채우시곤 하셨습니다. 이 어린 자녀들은 자신의 필요를 채워달라는 요구를 할 뿐이며 부모의 마음을 살피지는 못합니다.

성숙한 기도란 무엇입니까? 장성한 자녀는 무조건 부모에게 뭔가를 해내라고 조르지 않습니다. 그 자녀의 관심은 자신에게 떨어진 급한 문제에 앞서서 부모님의 안위와 마음을 먼저 헤아리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 또한 다짜고짜 뭔가를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려고 애쓰기 마련입니다. 떼쓰듯이 이것저것 달라고만 하는 자녀 보다는 ‘아버지 요즘 어려운 일 없으세요?’이런 인사를 건네는 자녀를 볼 때 아버지는 자녀가 꽤 장성했다고 느낄 것입니다.

기도를 호흡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숨은 내쉬기도 해야 하지만 들이마시기도 해야 합니다. 성장해 갈수록 숨이 길어지고 깊어집니다. 깊이 들이마실 때 아버지의 말씀이 들리고 그 심정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기도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수준은 어린아이 중의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오래 교회를 다녔다고 해서 다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교회를 가득 메운 성도들 모두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을지조차도 불투명합니다. 천국에 갔더니 그곳에 꼭 와야 할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당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성장을 다 할 때는 주님 품으로 돌아갔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순간이 오기까지 온 힘을 다해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성숙한 기도는 악을 쓰며 중언부언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인격적으로 만나서 정감있게 대화를 나눠야겠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기도 하러 기도원에 올라갔답니다. 저녁 기도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와서 잠을 청하려 하는데 옆방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답니다. 서로 얼마나 정겹게 대화를 나누는지 그 소리가 마치 노랫소리 같았답니다. 다음날 우연한 기회에 그 옆방 사람을 만났는데, 인사차 어제 들렸던 대화에 관해 말했더니 그분은 밤새 주님께 기도를 드렸었답니다. 형식적인 기도보다는 이런 사랑의 속삭임이 주님이 기뻐하시고 듣고 싶어 하시는 성숙한 기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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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2 하나님과 친하다2020. 3. 17. 12:11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최선의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어찌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적당한 것으로 채우려 하시겠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좋은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지만 언제까지나 유치한 기도를 드릴 수만은 없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가 갑자기 사과가 먹고 싶었습니다. 스스로는 사과를 구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아빠 앞에 갔습니다. “아빠 사과 주세요. 사과가 먹고 싶어요.” 이렇게 말했더니 아빠의 반응이 신통치 않습니다. 그래서 또 이렇게 덧붙입니다.”모양은 동그랗게 생겼어요. 위에는 꼭지가 있고 아래는 꽃이 달려 있던 흔적이 있어요. 껍질은 때로 파랗기도 하지만 대개는 빨간색이이에요, 비교적 단단하지만, 한입 베어 물면 하얀 속살이 나오는데 그때부터는 달콤한 맛을 느끼며 먹을 수 있어요. 바로 그것 주세요.”아빠는 그제야 아이가 원하는 사과를 이해하고 그것을 어렵게 구해오게 됩니다. 그래서 가까스로 그 아이는 사과를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다르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사과를 구하기도 전에 그것을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너무 사과가 먹고 싶어서 아바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주님은 이미 사과를 뒷짐에 쥐고 계십니다. 그리고 도리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뭐가 먹고 싶니? 적당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 보아라. 사~과”이 어린이는 그 말을 알아듣고 ‘ㅅ’을 발음하기 시작했을 때 얼른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예 있다! 너 이거 먹고 싶었지. 맛있게 먹어.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네가 이것을 먹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단다. 네가 나에게 와서 이것을 달라고 해서 고마워. 사랑하는 내 자녀야!“  

이런 주님 앞에서 우리가 어찌 이것저것을 달라며 떼를 쓸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마음 아파하고 계십니다. 어제도 그랬는데 오늘도 변함없이 달라고만 매달리는 우리 모습을 보면 안타까워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성숙하여 갈수록 더 많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이 모든 것이 덤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당장 배가 고픈데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간구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단순한 필요를 채워주는 분만은 아니신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를 도울 양으로 자주 시장에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워낙 안 좋았기 때문에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 이곳저곳 발품을 파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시장 입구에는 과일 가게가 있었는데 하루는 어머니가 바나나를 하나 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돈으로 바나나 한 개에 백 원이었으니 아무나 사 먹을 수 없는 귀한 과일이었는데, 어머니께서 특별한 선물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먹고는 싶었지만, 가정 형편을 생각해 사달라고 한 번도 조르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내 마음을 알아채신 모양이었습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는 얼마나 나를 잘 알고 계셔서 항상 좋은 것으로 늘 채우신다 생각하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제 삶의 계획표는 늘 놀라움을 선사합니다. 분명 나에게는 커다란 불행으로 다가온 일인데, 나중에 가보니 더 없는 축복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가난이나 부모님의 잦은 다툼, 아버지의 뇌 손상 사고, 형제들 간의 갈등, 전공의 시험에서 떨어진 것, 셋째 아이의 선천성 백내장 등등 그 어느 것 하나 나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이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 은혜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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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2 하나님과 친하다2020. 3. 17. 12:10

고3 엄마가 수능을 앞둔 자녀를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대학에 꼭 진학해서 쓰임 받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학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명문대도 아니고 4년제라도 가게 해달라고 구했는데 야속하게도 안 들어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과한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닌데, 자녀가 대학에 떨어진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것이 아니냐고 염려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엄마의 기도를 과연 들어주지 않으셨을까요?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눅11:5~8

밤에 친구가 찾아왔는데 대접할 게 없어서 염치를 무릅쓰고 벗에게 가서 떡을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구체적으로 세 덩이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결국, 원하는 것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이 이루어진 이유를 ‘간청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간절함이 있다면 요구한 대로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5:14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구체적으로 간청했는데도 불구하고 대학에 못 가게 된 것은 기도를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뜻에 합당한 대로 들어주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에는 기도에 대해 자주 인용되는 권면의 말씀이 나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6~7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하라는 말씀인데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기도의 결과는 평강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가득 차게 되는데 그것은 기도한 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현상보다 더 중요한 평안이 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보다 평안이 찾아온 것에 대해 응답하셨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11:24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요일5:15

이 성경 구절들을 보면 앞으로 이루어질 것에 대해 기대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졌음을 믿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었다면 이미 받은 것입니다. 대학 가기를 기도했다면 대학을 가든 안 가든 하나님께서 이미 구한 것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학을 가지 못하게 되었더라도 가장 좋은 응답으로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도한 엄마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가장 좋다고 여기는 것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주신 가장 좋은 것을 감사함으로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사는 자녀가 대학을 가는 것에 있지 않고 그 엄마가 하나님 앞에 나왔다는 것과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구했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그 어려움 때문에 당장에라도 죽을 것만 같았는데 기도를 했더니 놀라운 평안이 찾아왔다면 그 순간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학에 떨어진 그 자녀에게도 동일한 사랑을 베푸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십여 년 전에 원인 모르게 복막염이 생긴 환자가 점점 악화가 되고 치료가 안 되자 내과로부터 복강경 검사를 의뢰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배는 단단하고 카메라를 넣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조직도 얻고 복막의 소견도 얻었습니다. 결국, 복막결핵으로 확진되어 치료를 시작했지만, 환자는 회복하지 못하고 한 달여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때부터 그동안 나타나지도 않았던 별거 중인 부인과 한 남자가 내 진료실을 계속 찾아와 복강경 수술의 후유증으로 환자가 죽었으니 책임지라고 윽박지르고 소비자원에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지만 매번 찾아와서 큰소리치고 가는 그들 때문에 아주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면서 사소한 일에 연연해 하지 말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갑자기 평안해졌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찾아왔는데, 더는 심장이 벌렁거리지 않았고 침착하게 대면할 수 있었고, 도리어 힘닿는 데까지 돕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 다시는 찾아오지도 않았고, 담당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애초에 요구했던 것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서 원만하게 합의를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의 기도를 평안으로 응답하신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Posted by 소겸
2 하나님과 친하다2020. 3. 17. 12:09

한번은 소그룹 모임에서 한 자매가 저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특별한 달란트가 있는데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있어서 주님의 꾸지람을 들을까 무섭다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 열 달란트를 남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설교를 듣곤 합니다. 하지만 이 비유의 핵심 메시지는 그 종들이 남긴 달란트의 수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종 세 명을 상중하처럼 남긴 달란트의 수에 따라 셋으로 구분할 수도 있겠지만, 두 부류로 나누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종들에게 내린 평가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21절과 23절에 나오는 주인의 칭찬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25:21, 23

다시 말하면 이 주인의 평가 기준은 몇 개를 남겼나에 있지 않고 어떤 자세로 그 달란트를 관리했는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열 달란트를 남긴 사람이나 네 달란트를 남긴 사람은 똑같은 칭찬을 들었습니다. 성경에 열 달란트 남긴 사람에게 더 착하고 더 충성된 종이라 했다면 우리는 당연히 열 달란트에 대한 갈망을 가져야 하겠지만 두 사람은 똑같은 칭찬을 들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얼마나 충성했는가를 보고서 그들에게 걸맞은 상을 주신 것입니다.

5, 2 달란트 1 달란트
칭찬착하고 충성됨 비난악하고 게으름

책망을 받은 종은 주신 달란트를 갖고 땅에 묻어 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게으름의 자세를 가졌기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비난을 받은 것입니다. 만약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그 달란트를 갖고 성실하게 일했는데 한 달란트만 남았다면 주인이 그에게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은 비난의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 남긴 숫자에 상관없이 그 과정과 자세를 보시고 같은 칭찬을 하셨을 것입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계2:10

생명의 면류관을 갈망하는 우리는 나보다 더 많은 달란트를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며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죽도록 충성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군의관 시절 3년 중 마지막 1년은 대전에서 근무했습니다. 거의 날마다 근무가 끝나고 퇴근하기 전에 부대 입구에 있던 군인 교회에 들러 찬양도 하고 기도도 드리며 나만의 시간을 갖곤 했습니다. 하루는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는데, ‘네 손을 복되게 하겠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군을 제대하고서 외과를 전공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정말 감격스러운 축복의 말씀이었습니다.

전문의가 되고서 수술을 하다 보면 급작스럽게 기구가 고장이 나거나 당장 필요한 물건이 없기도 합니다. 상황에 맞게 고쳐 쓰거나 창의적으로 적절하게 쓰다 보니 간호사들이 우스갯소리로 나를 ‘맥가이버’라고 부르곤 하였습니다. 국내 최초로 온열 복강내 항암치료를 복강경을 사용해서 치료하는 방법을 고안하고 좋은 치료법으로 자리매김하게 해주신 것도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도 늘 주신 달란트를 충성 되게 쓰고 있는가를 자문하곤 합니다. 주신 분의 뜻을 잘 헤아리고 잊지 않는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 되고 싶습니다.

Posted by 소겸
2 하나님과 친하다2020. 3. 17. 12:09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때 사랑의 결핍은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하고 조건 없이 사랑하는 하나님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의 사랑 받고 싶은 욕구를 채우지 못합니다. 내 욕구를 위해 남을 돕고 봉사하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또 진실함으로 사랑하지 않고서도 다른 사람의 사랑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일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보이는 결과로 사람을 판단하고 가치를 매기며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에 자신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면 성공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일의 결과와 업적을 드러내기 위해 남을 이용할 수 있고 협력해야 할 관계가 경쟁 관계로 바뀌어 서로 시기하고 미움과 질투 그리고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역의 결과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평가받기 때문에 보이는 결과에 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로 맺어진 관계면 일에 의해 관계도 좌지우지될 수 있습니다.

일은 결과가 있어야 하고 결과에 따라 사람을 평가합니다. 누구든지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하고 목표를 이루는 성취감은 자기만족으로 보상되므로 일에 매달리게 되기 쉽습니다. 과도한 양의 일과 책임 그리고 경쟁은 스트레스의 원인이 됩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은 강박감과 두려움으로 연결됩니다. 걱정과 불안은 두려움을 더욱 과장하게 되고 과도한 스트레스는 에너지소모로 인해 신체에 부담을 주어 건강을 악화시킵니다. 몸도 마음도 아프며 감정적으로 약해져서 분노폭발이나 탈진으로 가기 쉽습니다. 고통을 피하는 방법에 쉽게 집착하게 됩니다. 만약 실패하게 되면 패배자가 되어버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원망하며 비난하게 됩니다.

일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쓴다면 일의 결과에 따라 우월함과 위축감을 느끼게 되고 늘 남과 비교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심지어 부부간에도 경쟁관계가 되어 부부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허락하시는 것은 열매를 맺으라고 요구하기에 앞서서 그 일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이 주어진 근본을 생각해보면 그 중심에 분명 하나님이 계실 것이며 그분이 개입하기를 원하고 계시는데, 그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열심히 일만 하려 한다면 우리는 핵심을 잘 알지 못하고 피상적인 일에 매이게 되고 말 것 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금융회사의 대표님은 회사 경영의 원칙 중 하나가 직원을 되도록 해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맡은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고 그냥 관두게 하는 것 보다는 그 사람의 재능에 맞는 일을 사려 깊게 찾아서 맡김으로써 서로 좋은 신뢰관계를 쌓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직원은 대개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내어 놓곤 한다고 합니다. 일보다는 관계를 중시 여기는 풍토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내어 놓아야 하는 결과물보다 그 과정에서 맺게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중시한다면 우리가 상상도 못할 가장 효율적인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소겸
2 하나님과 친하다2020. 3. 17. 12:08

한 학생이 강의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가면서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나이 지긋한 한 교수님이 그 학생을 불러 세우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학생은 왜 그렇게 열심히 뛰어가고 있는가?”

그러자 학생이 대답하기를

“수업에 안 늦으려고 그러지요, 늦으면 학점을 잘 못 받습니다. ”

다시 교수님이 물으시기를

“왜 학점을 잘 받으려 하는가?”

“좋은 직장을 가기 위해서입니다.”

질문이 계속 이어집니다.

“좋은 직장을 왜 가려 하는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죠!”

“돈은 왜 많이 벌려고 하는가?”

짜증이 난 학생은 급기야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잘 먹고 잘살다 죽으려고요!”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그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음, 그렇군. 학생이 지금 뛰는 이유가 죽으려고 뛰는 거군. ”

우스갯소리 같은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걸 왜 하고 있는지 인생의 진정한 목적을 잘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명백하게 제시할 답변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한 유명한 최고경영자가 회사에서 지나가다가 사원과 마주치게 되면 ‘자네가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물었고 대답을 시원하게 하지 못하면 해고를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잘 모른다 해서 자녀 됨의 권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지금 이곳에 우리를 두신 이유를 알고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이 아버지께서 우릴 세상에 남겨둔 뜻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10:3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벧전4:11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표현하는 근본적인 행동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방향성이 정해진다면 이것은 훌륭한 삶의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한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일의 결과는 다 하나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가끔 동료 의사들과 만나서 대화를 하다 보면 공통의 관심사는 자산운용에 관한 것, 근무에 대한 불만, 골프 이야기 등입니다. 그중 단연코 1순위는 ‘돈’ 이야기입니다.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그런 자리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같은 주제를 논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은 마치 우리를 좋게 치장하는 도구 같아서 믿는다고 하면 사람들에게 단지 하나의 자격 조건을 보여주는 것과 유사합니다.

물론 개중에는 자신의 소유로 좋은 일을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드물게 있지만 대부분 의사는 어떻게든 돈을 모아서 노후에 안정된 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요즘 개업을 한 의사들의 형편이 너무 어려워져서 폐업이 속출하고 심지어는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현실을 바라보면서 좀 더 고상한 삶의 목표를 가진다면 우리 삶에 숭배하다시피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Posted by 소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