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누가 선교사인가2020. 3. 16. 19:53

기독교의 핵심 원리인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모든 조건에서 인간과 같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선교의 중요한 원리로서 성육신의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선교지에 가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처럼 현지인들에게 강자와 가진 자로서 그들 위에 서지 말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선교사가 선교적 의미의 성육신을 그 사람들과 비슷하게 수염을 기르거나 옷을 입고 그들의 언어를 배우는 정도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나님이신데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과 우리가 선교지의 원주민들과 비슷한 상황에 부닥치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신 것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것을 흉내 내서 우리가 그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낮아지겠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교만일지도 모릅니다. 선교사들이 성육신적 삶을 표방하면서도 현지인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고 그들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면서 그들 위에서 군림하곤 합니다. 자신들은 축복받은 민족이고 그들은 저주를 받은 족속이라고 생각하며 이런 차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면서 선심을 쓰듯이 그들 앞에서 음식을 같이 먹고 비슷한 외모나 옷을 추구하며 그것이 대단한 성육신적 선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육신은 낮아짐의 의미도 있지만 같아짐의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녀로서의 권위와 모든 복락을 그들도 똑같이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들의 구원에 우리가 참여하는 일은 실천 가능한 성육신이 될 것입니다. 열등한 존재로 여겨 평생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진정한 성육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반복적인 죄를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칭하시고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그 호의가 그들에게도 똑같이 베풀어져야 합니다.

더 앞선 성육신의 개념은 ‘올림’입니다. 상대방을 나보다 더 존귀한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에게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교훈을 얻고 하나님이 날 사랑하셔서 보내주신 귀한 선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은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어떤 의미 있는 존재로서 주님이 허락하신 사람들입니다. 광야에 있던 요한이 예수님이 흥하여야 하겠다고 고백했듯이 우리도 그들이 더 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해달라고 복을 빌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은 성육신을 설명할 때 우산의 비유를 드시곤 하십니다. 성육신은 비가 오는데 비 맞는 사람과 같이 우산을 쓰고 가는 것이 아니라 우산을 버리고 같이 비를 맞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산이 좋은 것을 알지만, 그들과 같아지기 위해 기꺼이 비를 맞을 마음을 갖는 것이 진정한 낮아짐이라는 말입니다.

학생 여름 수련회 때 다미안 신부에 대한 연극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콩트였지만 깊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 환자 격리지역인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 들어가 그들과 16년 동안 동고동락한 최초의 백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지 않아 환자의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주님, 저에게도 같은 나병을 허락하시어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고 손가락이 없는 사람의 고름을 자신의 손을 짜주었습니다. 결국, 자신도 나병에 걸렸고 마흔아홉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우리가 손해를 보지 않고 남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흉내는 낼 수 있어도 능력이 드러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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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