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구속(Redemption)2020. 3. 17. 11:58

1.

내 앞에 하얀 도화지 한 장을 가져다 놓고 펜을 듭니다.

한 점을 찍고 펜 꼬리를 돌려 우아한 곡선을 그리다 보니 또 꽃이 그려집니다.

무궁화를 닮기도 했지만 아마 이런 꽃은 세상에 없을 겁니다.

눈을 그윽이 감고 냄새를 맡아봅니다.

진한 잉크 향 저 너머로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누군가 나를 툭 친다면 내 입에서 줄줄 새어나올 말들이 아름다운 향기로 세상을 이롭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2.

달음질하는 선수는 푯대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 눈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옆에서 환호하는 관중을 바라볼 겨를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발바닥에 상처를 입어도 아픈 것조차 느끼질 못합니다.

저 푯대를 넘어서면 달려온 길을 되짚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느 때부터인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각이 밀려오고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끝에 거의 다다랐다는 말로 표현 못 할 마지막에 대한 경각심은 이런 나의 행동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뛰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제가 봐야 할 많은 것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걷습니다. 푯대가 멀어져만 가는 것 같은데, 뛰는 사람보다 더 빨릴 그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3.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서 있습니다.

어두운 밤에 등불을 비추듯이 제가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강한 빛이 비칩니다.

주마등같이 스쳐 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제가 들어야 할 메시지가 적혀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뒤에서도 아우성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가다 말고 고개를 돌려봅니다.

저쪽이 더 급해 보입니다.

안타깝지만 방향을 틀어봅니다.

한참을 이렇게 우왕좌왕하다가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아버렸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울부짖었던 선지자처럼 하늘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길 기도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림자가 없으신 주님처럼 나의 등 뒤에 서 있는 형제에게도 사랑을 베풀 요령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4.

나는 참 존귀합니다.

내가 그렇게 한 게 아니라 그분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얼마나 귀한지 나의 가치가 주님과 방불합니다.

그러나 내세울 만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내 겉모습을 보고 손뼉을 칩니다.

그것을 보면서 내 속은 마치 불에 타는 것 같습니다.

나는 오늘도 골방에서 바닥을 두드리며 대성통곡하고 있습니다.

내가 우는 이유는 내가 아파서가 아닙니다.

온통 가시가 돋친 나를 꼬옥 안으시는 주님의 살과 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5.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더 잘 알게 된다면 실족하고 말 것입니다.

내 목에 매야 할 연자 맷돌을 떠올립니다.

나는 회칠한 무덤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형제들이 나 때문에 주님과 멀어진다면 죽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들과 함께 존재함으로

나는 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더 그분을 알아갈수록 그들은 내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때문에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어요.”

6.

고통스럽습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나를 짓눌러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아름답게 지으신 세상이 타락의 결과로 변해버린 현실 속에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한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깊은 영적 체험을 할수록 숨이 막혀 갑니다.

아바 아버지를 외치셨던 예수님의 절규처럼 심장이 쥐어짜 집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내 안에 들어와 가득해짐을 느낍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사람들의 외치는 소리가 흐릿해지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평안함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나는 거룩한 고통을 누립니다.

감사의 눈물을 흘립니다.

7.

형제의 고난은 나를 괴롭게 만듭니다.

원래부터 우리는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아파할수록 나는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차라리 내가 그 고통을 모두 내게로 채우고 싶다고 기도합니다.

힘들고 지쳐 외로이 쓰러져 있을 때 두 팔을 벌리시고 다가오셔서 안아주시는 주님이 나와 형제의 짐을 덜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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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