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구속(Redemption)2020. 3. 17. 12:00

우리 삶을 십자가를 빼놓고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숙해간다는 것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말합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할례를 받은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 바리새인, 종교적 열심,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라고 소개하면서 이 모든 신뢰할 만한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배설물로 여긴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3:7~8

바울이 자랑한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할 것을 우리에게 명하였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3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 없습니다. 그분이 더 많이 드러나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고난이 있기 마련이며 남들이 보기에 힘들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피해도 될 것을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장성한 분량의 믿음을 가진 자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살아도 될 텐데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미련하다고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부당하게 받는 고난도 성도에게는 유익한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내가 받는 고난은 무엇인가를 늘 되새겨 보면서 내게 지워진 십자가가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대전에 살던 집은 담 안에 꽤 넓은 텃밭이 있었습니다. 보통의 집이라면 정원을 꾸미겠지만, 우리는 그 밭에서 대부분의 음식재료를 얻곤 했습니다. 배추, 무 등을 심어놓은 밭에는 언제나 배추흰나비와 그 애벌레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운이 좋게도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오는 신기한 장면을 몇 번이나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아름다운 나비로 변하듯이 자기 죽음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또한 소생함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조금 모양이 변하는 차원이 아니라 완전히 환골탈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종(種; species)이 바뀌는 정도의 변화일 것입니다. 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경험을 단 한 번에 이뤄지는 일회성의 이벤트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하고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합니다. 고통스럽고 피해가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볼품없는 번데기에서 아름답게 변한 나비를 보듯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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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