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하와가 벗었음을 인지하고 두려워하여 숨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가죽옷은 그들이 엮어 입은 무화과 나뭇잎 치마와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한 첫 번째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희생이 있었듯이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많은 부분을 회개하고 고쳐나가기 위해 희생을 해야 합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9:22
그 희생을 다른 곳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먼저 드려야 합니다. 내가 희생제물이 된다는 것은 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죽은 만큼 나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이 살아나십니다. 자기 죽음은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을 얻기 위한 필수적 단계로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어렵게 얻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서 잡으려는 순간 하나님이 그 손을 막으시고 이삭 대신에 수풀에 걸린 숫양을 준비하셔서 번제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아브라함에게도 모리야산으로 가는 3일 길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며 마치 자신이 죽는 것 이상의 심한 괴로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런 아픔 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위해 각 집의 처음 난 것을 치는 무서운 재앙을 내릴 때 각 집의 장자가 죽음을 피하는 방법은 어린 숫양을 잡아 그 피를 그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내 집의 문설주에 발라진 어린 양의 피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OO교회 교인이라는 명패 하나가 그 피를 드러내긴 역부족일 것입니다. 그 피를 바르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고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다시피 하며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피를 흘려주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그 피가 증표가 됨을 나타내는 일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으니 이젠 우리가 주를 위해 죽을 차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아프가니스탄에 단기 봉사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북쪽의 시골 마을이었는데, 현지인들이 우리를 대접하기 위해 양을 잡는 장면을 보여준 주었습니다. 그 양은 몇 번 발버둥 치는가 싶더니 큰 소리도 내지 않고 금방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습니다. 땅바닥에 흘러내려 고인 붉은 피를 보며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하나님 어린양의 보혈을 떠올렸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이 제물로 드려진 수송아지의 피를 뿌려 속죄제를 드리듯이 그 피로 나의 죄가 사해지고 생명에 이르게 되는 놀라운 진리를 기억하면서 속으로 흐느껴 울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게 할 내가 가진 피의 흔적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내가 지고 주님 따라갈 십자가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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