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질문에 대해 각자 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한국 교회에 너무 자연스럽게 쓰이는 성직자, 평신도, 예배당이라는 단어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물론 이 제시된 단어들에 대해 명확한 식견을 가지고 이를 부정할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사람은 별 거부감을 못 느낄 것입니다.
둘째, 당신 앞에 타 종교를 열심히 믿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전도할 것입니까?
독실한 불교 신자를 만난다면 도리어 자신의 신앙이 약해질까 봐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를 만난다면 두려운 존재라는 선입관 때문에 그 그림자라도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나 긍휼을 떠올리기보다는 나와는 다른 부류이며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게 될 것입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호헌 측의 개척교회였습니다. 담임 목사님은 신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시던 교수 출신이셨는데, 학문의 깊이가 깊고 세상을 읽는 심안이 탁월한 분이셨습니다. 십여 년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가장 근본적인 윤리와 규범에 대해서 확실히 훈련을 받았습니다. 남을 배려하고 섬기는 일에 대해 목사님과 교회의 어른들이 많은 것을 보기도 하셨습니다. 한국 보수 교단의 전통적 신앙생활에 대한 기본에 대해서도 많은 교육을 받았는데, 지금 갖게 된 통합적 관점에서 보면 많이 치우진 이분법적인 신앙행위였지만 삶의 기본기를 다질 수 있던 귀한 시기였습니다. 지금 같아서는 그런 교회에 다시 나가기는 어렵겠지만, 인생 여정에 시기별로 꼭 필요한 공동체와 훈련을 베풀어두신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배의 침몰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어느 위험한 해안에 보잘것없는 인명 구조소가 하나 있었습니다. 말이 구조소이지 인명구조를 위한 것이라야 다 낡아빠진 소형 보트 한 척밖에 없는 허름한 오두막집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몇 안 되는 구조요원들은 헌신적인 봉사를 해서 수많은 사람을 구조해냈습니다. 작고 낡고 허름한 이 구조소는 그래서 점점 유명해져 갔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기서 구조를 받은 몇몇 사람들과 그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재산과 시간을 바쳐 구조사업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척의 신형보트가 새로 구매되고 새로운 구조대원들이 투입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이 구조소도 좀 더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조소에서 일하는 사람 중 일부가 구조소 건물에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구조도 좋지만 구조받은 사람들이 좀 더 안락하게 쉴 수 있는 공간과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많아지면서 이전에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편의성과 안락함에 대해 점점 눈이 띄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연히 구조소는 증·개축을 해나갔고 실내의 모든 시설도 최고급의 자재들로 아름답고 안락하게 가꾸어져 갔습니다. 당연히 상황이 생기면 구조소로 이용되었지만, 나머지 시간에는 점점 사교클럽이 되어 갔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구조소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점점 화려하고 멋있는 옷들로 꾸며대고 있었습니다. 전에 없던 안락함과 편안함에 익숙해져 간 그들은 구조 자체에는 차츰 흥미를 잃어갔습니다. 그러니 구조를 위해서는 또 다른 구조 전문요원들을 고용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발생하여 처참한 모습의 구조된 사람들이 실려 오면 그들이 애써 깔아놓았던 카펫과 아름다운 가구들이 더럽혀지는 것에 자기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지곤 했습니다. 보다 못한 그들은 본 건물 옆에 새로 자그마한 구조소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거기엔 조난당한 사람들, 구조한 사람들만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그 옆의 본 건물에서는 화려한 의상의 회원들이 번쩍번쩍 빛나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잔을 마주치면서 먹고 마시며 춤추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세월이 가면서 그 옆의 자그마한 구조소도 점점 크게 확장돼 갔습니다. 그 구조소 역시 원래의 구조소와 별다를 것 없는 과정을 거쳐 점점 거대하고 웅장하게 그리고 아름답고 멋있게 바뀌었습니다. 그리곤, 그 옆에 또 하나의 별채, 아주 허름한 구조용 구조소를 지어놓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진짜 구조소 역시 똑같은 순서로 변모해가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해안가에는 이렇게 화려하고 큰 집과 그 옆의 자그마한 구조소가 딸린 이상한 형태의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만 가고 있었습니다. 해안에는 여전히 조난당한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고, 그들은 모두 구조소에 실려 오긴 했지만, 그들이 정작 들어갈 수 있는 방은 언제나 작고 낡고 냄새나는, 그래서 춥고 무섭고 배고픈 구조용 구조소일 뿐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현대 교회의 상황을 날카롭게 풍자해 말하는 것입니다. 인명 구조소가 처음 생긴 취지는 사람을 구하기 위함인데 사람들이 그 규모가 커지고 더 체계적이 되면서 도리어 역기능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을 향한 예배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교회를 아름다운 클럽으로 꾸며 사교장을 방불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그 흐름에 휩쓸리다 보니 교회가 교회로서 그 본질적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갈수록 화려해지고 강당, 카페, 피트니스 센터 등의 문화 공간을 갖는 교회의 모습이 반드시 부정적이지는 않지만 이런 좋은 시스템들이 부작용을 낳고 있다면 그 본연의 역할에 대해서 재고해보아야 하고 소수의 사람만이라도 다시 제대로 된 인명 구조소를 하자는 외침이 나와야만 합니다.
신도시에 새로 생긴 교회에서 그 당시 내가 좋아하던 찬양사역자를 모시고 집회를 한다기에 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그리 크지 않고 아담했는데 안에 들어가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교회라기보다는 소극장에 왔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계단식 의자와 현란한 각종 조명장치 그리고 심장을 울리는 엄청난 음향시설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지역주민을 위해 그 공간을 개방하고 문화 사역을 하겠다는 좋은 계획도 갖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렇게 변하는 것이 좋고 나쁜 것을 떠나서 교회가 가져야 할 본질을 잊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어떤 학자가 세상에서 경험할 고통과 연속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경험하는 삶이 주일이 아닌 평일에도 교회가 아닌 삶의 터전에도 똑같이 나타나야겠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문제들을 갖게 된 원인을 몇 가지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신학교의 신학교육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될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삶 자체가 성경에 기록될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교리를 따질 필요도 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대로 삶에 배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그 삶에서 교리들 뽑아내어 체계화하고 학문으로 집대성하였습니다. 수십 세기에 걸쳐 다듬어지고 확고해진 신학은 이제 명실상부한 학문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교리들이 삶에서 나왔음에도 다시 삶에 반영시키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많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기독교적 가르침에 관하여 바르게 ‘생각’했지만 그들의 삶이 반드시 그들의 신념을 반영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서구의 기독교 신학교에서 이런 편향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학생들은 4년 동안 머릿속에 명제적 진리를 쌓아 올린 다음 실제 사역을 위해 지역 교회로 보냄을 받습니다.
4년 혹은 7년 동안 훈련을 받고 지역 교회에 파송을 받은 목회자들은 그간 배운 학문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수고를 해야 하고 그나마 제대로 못 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 밑에서 배우고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은 나름대로 독특한 신앙의 성격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들이 한국교회의 문제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말하기는 쉽지만, 서로 사랑하며 살기는 어렵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배운 것을 지금은 교리만 남아서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말씀처럼 행함이라면 열매가 없다면 신앙이라는 그 나무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열매를 맺어야 또 다른 나무가 생길 수 있을 텐데, 모양만 나무 모습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하시려는 구원 사역에 도리어 방해가 되는 모양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초기 한국 기독교의 신학은 선교사들에 의해 정립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성향에 따라 교단의 성격이 정해졌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 파송된 선교사들도 파송 국에서 삶과 교리의 편향성을 나타내는 신학교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청교도적 경건주의 신학을 내세웠는데 장로교의 효시가 된 언더우드는 성령운동을 강조하고 복음주의적 신앙을 강조했으며 감리교단의 아펜젤러는 복음의 구원하는 능력, 사죄에 대한 확신과 감격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제대로 된 한국적 신학의 기반이 부족하고 사회참여를 지양하는 교회의 분위기는 정숙주의 신앙을 강조했고 지역 사회에 대한 영향보다는 개인 영혼구원에 치중하였습니다. 또한, 한국 고유의 샤머니즘적 신비주의와 묘한 일치를 이루어 서구의 교회가 국가적 교회적 공동체적 개념인데 반해 한국 교회는 개인의 경건주의 신앙으로 흘렀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처음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이던 1984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의 분위기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경건하고 엄숙하였습니다. 예배 전에 웃고 떠드는 것은 물론 옆 사람과 가볍게 대화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교회에서 사용한 악기는 피아노 한 가지뿐이었고 공예배에서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예배당은 구약의 성소같이 여겨져서 하나님이 임재하는 장소로 생각하고 특히 강대상이 있는 단에는 아무나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주로 권사님 한 분이 먼지를 닦으러 올라가시곤 했습니다. 교회에 있는 집기와 모든 물건은 성물이라고 해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훈련받았지만, 전형적인 성속의 이분법적 교회 공동체를 경험하는 기회였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청년부를 다닐 때 이원론의 문제점에 대해서 같이 공부하고 토론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만큼 심각하게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30여 년 전에도 이런 고민을 했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교회의 이런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점점 심해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중세의 교회는 플라톤의 영향 아래 영육이원론을 내세웠습니다. 즉 영혼은 거룩하고 육체는 속되고 더럽다는 개념인데 이것이 기독교에 나타난 이원론의 효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교회는 거룩하고 육체가 거하는 세상은 부정하다는 교회와 세상의 이원론적 구조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속이원론이 체계화되었는데 세상보다 거룩한 곳은 교회이며 교회보다 거룩한 곳은 수도원이라는 생각에 많은 사람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려고 자처해서 수도원을 향했던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사제를 세워 예배를 집전하기 시작했는데 이 영향으로 예배를 위해 구분된 사람들을 성직자라 하고 나머지 일반 대중을 평신도로 나누기 시작하였습니다. 성속이원론의 영향으로 성도들은 세상에 대해 그릇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2:15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요17:18
대부분 성도는 세상의 의미를 교회의 바깥 공간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종료하면서 목사님께서 성도들을 향해 이제 예배가 끝났으니 세상에 보낸다고 선포할 때 대부분 교인은 거룩한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이제 죄로 찌든 직장과 가정 등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 보냄을 받는다고 이해할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거룩한 곳인 교회나 예배당의 바깥 공간이라는 암시를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언급한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사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뿐 아니라 제자들이 사명을 부여받는 사역의 장소로서 ‘세상’을 언급하셨으며 요한은 하나님 나라와 대립한 영역, 사단에 의해 대표되는 집합적인 인격체로 묘사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에 의해 통제를 받는 체제를 가리키며 본질상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합니다. 세상의 성경적 의미는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세속주의적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면 교인들은 ‘세상’이라 부르는 곳을 향해 출발합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열심히 듣고 마음에 굳센 결심을 하고 이번 한 주는 한번 잘해보겠다고 되뇝니다. 집과 직장에 돌아와 보니 교회에서 생각한 것들이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며칠이 지나면 다시 주일을 기다립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좋은 설교도 듣고 마음을 재정비하고 다시 힘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생활을 한다면 일주일 중 하루만 신앙인이 되는 꼴일 것입니다. 교회도 세상에 속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좀 더 쉽게 이분법적 사고에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루터는 성속주의와 평신도 성직자를 나누는 로마 가톨릭의 비성경적 문제를 직시하고 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 당시 중세사회에서는 제도 교회와 종교 의식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교회나 사제의 영향력은 대단했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그가 주장한 것은 만인제사장설입니다. 그는 모든 성도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 갈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나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왕 같은 제사장임을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믿는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직업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고 역설하며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분되는 이원론적 구조를 전면 부인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제나 수사 등의 종교적 지위가 평신도보다 더 높다는 성직우위론의 주장이 뒤엎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16세기 이후 부패하고 타락한 중세교회를 전면적으로 개혁하였고, 중세의 이원론적 가치체계를 전복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장로교의 한 교단 총회가 열리는 자리에서 봉사하는 장로님이 참석한 한 목사님께 ‘성도님, 이쪽에 와서 앉으시죠.’ 이렇게 말했더니 그 목사님이 노발대발하면서 ‘난 목사인데, 성도라뇨?’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도라는 호칭은 우리에게 아주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성도의 영어표현은 saint인데 ‘성도 김철수’라고 불려 진다면 중세의 훌륭했던 수많은 성인과 같은 호칭을 받는 것이니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어떤 교회에서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을 ‘성도 아무개’라고 부르는 곳도 있고, ‘성도 아무개 목사’, ‘성도 아무개 집사’ 이렇게 부르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목사라는 직함은 역할을 말하는 것이지 계급이 아닌데, 스스로 ‘섬기는 종’으로 자처하면서 어른 대접을 받으려 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지각 있는 많은 목사님이 이런 인식을 하고 평신도나, 중직자 등의 단어를 지양하고 모든 성도를 귀하게 여기는 모습은 참 고무적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종교 개혁 이후 타파된 이원론의 잔재를 다시 가르치고 있으며 이런 현실을 도리어 교회의 안정적인 구조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예배당이라는 용어는 교회를 예배드리는 처소로 이해하며 구약시대의 성전과 동일시하는 개념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순간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찢어짐으로 이제는 제사장 직분을 가진 모든 성도는 지성소를 목격하는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역행해서 성전을 세우기를 힘쓰는 교회가 성경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또한 종교개혁 이전으로 돌아가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직이라 부르는 목회자는 지체의 역할을 말하는 것이지 계급은 아닌데 교회에서는 여전히 당회장, 부목사, 장로, 권사, 안수 집사, 서리 집사, 권찰 등의 서열이 메겨지고 특히 신학교 출신의 목회자는 교회 내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며 상호 협력 하에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가는 교회의 리더십이 절실하다고 하겠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교회에서 봉사하도록 권유하면서 교회에서 하는 봉사는 거룩한 것이며 직업은 세속적이라는 개념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각자가 지닌 직업에 소홀히 하면서까지 교회 봉사에 열심을 보이는 양태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교회는 굳이 이런 현상을 말리려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교인의 열심 있는 신앙으로 남의 모범으로 삼으려 해서 세상 직업과 교회의 봉사가 더욱 양분화의 길에 서게 됩니다.
학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학문의 주인임에도 교회는 신학만이 하나님의 학문이라는 견해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자연과학, 예술, 문학, 언어, 철학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영역이 아닌 것이 없음에도 신학만 붙들고 하나님의 학문을 운운하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창조과학회가 과학 또한 성경적이라는 증명을 해 보이며 열심히 활동하듯이 넓은 시각으로 하나님의 피조 영역을 구속하는 노력이 전 학문에 골고루 나타나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의 전에 나와 기도하시면 하나님께서 더 잘 들어 주십니다.’
‘세상의 직업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일이 교회에서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입니다.’
‘평일 내내 세상에서 찌든 영혼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서 말씀을 충전하고 새 힘을 얻어 다시 세상에 나가야합니다.’
교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들인데, 다시 한 번 이런 말들에 대해 재고를 해봐야 할 것입니다. 김규욱 목사는 포괄적인 세계관에 의해 삶의 전 영역이 하나님을 배우고 경외하는 신앙생활이요 예배생활이라는 기독교 진리의 확산이 너무도 절실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속을 논하며 교회와 세상을 구분 짖는 우리의 신앙 행위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졸속한 것인지를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본과 1학년 때 들었던 원종수 박사님의 간증 테이프 중에 세상의 지식이 들어가기 전에 성경을 봤다는 말이 인상적이어서 한동안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성경을 한두 장씩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만해도 성경과 신학만이 하나님의 학문이고 의학은 세속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했었습니다. 내가 공부했던 학문을 완전히 하나님 것으로 구속할 수 있었다면 좀 더 제대로 된 의사가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듣는 세상에 대한 영향력은 세속적인 성공 주의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목사님들은 성도들을 향하여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에 들어가도록 기도하고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도 높아지길 축복합니다. 믿음생활을 하면 만사가 형통하다는 공식을 입증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흔하게 들어볼 수 있는 말이 세상에 대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서라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높은 직위에 오르거나 많은 재물을 갖는 것이 복음을 전하기가 쉽다는 논리입니다.
세상에 대한 영향력은 내가 가진 재물과 권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관점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따라가기 위한 교묘한 술수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뭔가를 해내고 있다고 생각할 때 주님은 그 자리에 안 계십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다른 가치관을 갖고 세상에 맞서야만합니다. 겸손히 그분의 역사를 바라며 내게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는 일만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주를 따르는 신앙인도 세상의 가치관과 똑같은 성공을 이루려고 애를 씁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부와 명예를 누리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과도한 교육열을 보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남을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생의 패배자처럼 여겨지는 절실함 속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와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조차도 모른 체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학교에 진학하거나 직장에 취업하는 문제도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느냐에 대한 것 이전에, 그러한 결과물이 나오는 과정에서 얼마나 하나님이 개입하셨는가에 관심을 둬야 합니다. 진정한 세상에 대한 영향력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몫이며 우리는 다만 순종할 뿐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보면 한국인의 정서에 배어있는 성공 주의가 교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성공하는 길은 세상이 알아주는 권위와 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훌륭한 성공은 바로 하나님의 성공입니다. 하나님이 성공하시면 그 자녀 또한 성공의 반열에 이르게 됩니다. 성공에 대한 성경적 가치는 세상이 바라보는 그런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잘 회복되어 가는가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날씨 좋은 토요일에 인근의 교회 성도들과 교회대항 축구 경기를 했습니다. 그 경기에서 이기면 받게 되는 상품은 꽤 좋은 것이어서 다들 최선을 다해 운동장을 뛰어다녔습니다. 응원하던 성도들은 각자 자신의 교회 팀이 이기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각각 우리 편이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과연 어느 편의 기도를 들어주셨을까요? 우리 편이 이기게 해달라고 한 기도 자체가 난센스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심이 더 깊고 더 간절히 기도한 팀이 이기도록 돕지만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그 게임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동안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기며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지에 대한 것이지 어느 팀이 이길 것인가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는 이긴 팀도 진 팀도 없으며 다만 그 과정을 통해 각 성도가 더 성숙해지는 성공을 이루길 바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당신은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성공하길 원한다면 세속적이지 않으냐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이고,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솔직하지 않다고 비난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확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성공을 이뤄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이 바라는 성공에 대한 정의가 있겠지만 정작 우리가 바라고 이뤄야 할 성공은 따로 있습니다.
85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가신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님은 아름다운 일화를 많이 남기셨습니다.
어느 해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 박사님 곁에서 자고 난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 손동길 씨가 잠자리를 정돈하고 먼저 세배를 올렸습니다. 박사님은 그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금년엔 날 좀 닮아서 살아보아.” 하고 덕담을 주셨습니다. 박사님의 큰 사랑에 어리광을 잘 부리던 제자는 “선생님 닮아 살면 바보 되게요.”라고 했습니다. 박사님은 껄껄 웃으시며 “그렇지, 바보 소리 들으면 성공한 거야. 바보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나?”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세상에서 바보로 사는 것이 성공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바보가 된다는 것은 세상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할 만한 다른 법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성공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가치관은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성공은 세상의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들 앞에 선한 사람이 되어 칭찬을 듣고 신앙도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추구해야 할 성공은 ‘하나님의 성공’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병원 신우회 모임의 회장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매주 모였는데 처음 나오는 직원이 있으면 간단하게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곤 했습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자매님은 어떤 성공을 이루길 원하시나요?”
이 질문에 저마다 자신의 소신에 맞게 다양한 답변을 합니다.
“저는 열심히 일하고 많이 배워서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어요.”
간호사의 당찬 대답이 아주 시원시원하니 듣기가 좋았습니다. 그 자매가 생각하는 성공은 자신이 맡은 업무에서는 최고가 되고 싶다는 야무진 꿈이었습니다. 어떤 자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환자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따뜻한 간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이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할 법한 좋은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형제는 솔직하게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 내 필요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겠냐고 말하면서 좋은 신앙을 가진 직장인이 되길 소망한다고 꿈을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성공에 대한 다양한 가치관이 있습니다. 모두 존중해주어야 할 귀한 생각이겠지만 그 가치가 세상의 것과는 구분되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뤄야 할 성공은 내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공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성공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공은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성공이란 하나님의 헤아림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경주를 마친 후에 사람들이 나에게 성공했다고 평가를 한다면 그것은 보이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공을 했느냐를 나타내는 척도를 발견해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관점에서의 성공이 바로 하나님의 성공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우매한 일일 지를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성공은 사람에게 평가되지 못할 고유한 영역을 지닙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결과들로 형제를 판단하며 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성공은 일의 성취가 아니라 관계에 있습니다.
흔히들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어떻게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까를 고민을 하는데, 문제는 그 고민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영역임에도 내가 열심히 하면 뭔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서 나의 뛰어난 영성과 믿음이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였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주가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못 하셔서 나에게 맡기신 것인가 아니면 나의 유익을 위해 나에게 허락하신 것인가?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도 관계를 맺길 원하고 계십니다. 하도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라도 관계를 맺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성공은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가장 통합적인 것을 꼽으라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이라도 낙원에서 자녀 된 우리와 가장 좋은 시간을 보내시길 원하시지만, 아직 채워야 할 사랑이 남아있기에 우리에게 사랑할 사명을 주시고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성공하는 길은 받은 그 사랑을 흘러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 가운데 제일은 사랑입니다. 내 의지가 아니라 이미 겪은 사랑에 감격하여 차고 넘치는 사랑이 되려면 내 죽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성공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의 가장 큰 자랑을 기억합니까?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바울도 자랑했습니다. 그 자랑의 내용은 분명히 우리가 바라는 성공과 같은 내용이어야 할 텐데, 놀랍게도 그 내용은 바로 ‘날마다 죽노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지신 십자가는 얼마나 큰 위안이 됩니까? 그분의 몸소 실천함이 있었기에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 죽음을 통해 우리는 성공에 이르게 됩니다.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야 할 진정한 성공은 사람들의 눈에 있지 않고 바로 하나님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빙자한 나를 위한 성공을 내어버리고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성공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감사하고 기쁨이 충만한 사람의 어깨에는 늘 십자가가 얹혀져 있습니다. 그 사람을 향해 미련하다고 하지 말고 나 자신을 돌아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도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온갖 야유를 보내고 조롱하지 않았던가요?
나의 전문분야는 복강경 수술입니다. 임상강사를 마치고 병원에 봉직의로 처음 부임하자마자 단시간 내에 수백 건의 충수절제술을 했는데, 지금은 보편화가 되어있지만, 그 당시에는 복강경으로 그 수술을 하는 의사는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한 복강경으로 대장암 수술, 담도절제술, 비장절제술, 위 수술, 탈장 수술 등 다양한 수술을 성공적으로 감당했는데, 외과의 거의 모든 영역의 수술을 복강경으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합병증 발생률도 매우 낮아서 직원들 사이에 수술 잘하는 의사로 좋은 평이 나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선교사가 되기 위해 직장을 관둔다니 많은 분이 의아해하셨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권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선후배나 교회 성도들이 좋은 직장을 포기하고 선교사가 된 것을 부러워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외과의사로서 또한 신앙인으로서의 성공을 이루어가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내가 정작 마음 깊은 곳에서 생각하는 성공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선교사가 되려는 것조차도 나의 성공을 이루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관계의 회복은 하나님과 이웃과 그리고 우주 만물과의 사이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담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부여하신 ‘생기’로부터 생명이 생겨나고 전인적으로 지어졌습니다. 온 천하 우주에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 아담이 필요하셨던 이유는 그와 교제하기 원하셨고, 그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살아 존재하는 동안 가장 힘써야 할 성공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담과 같이 친밀해지는 것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것이 해결된다면 덤으로 지혜도 주실 것이고 능력도 주셔서 맡은 일을 잘 감당할뿐더러 사람들을 전인적으로 살리는 일을 해내게 하실 것입니다.
두 번째의 회복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화평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2:13~14
온갖 죄악과 피로 물든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 경쟁하고 남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원수가 되는 것을 꺼리지 않습니다. 모든 욕심을 내어버리고 내 주변의 모든 이웃과 사랑하며 섬기는 관계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의 회복은 자연과 온 우주 만물과의 관계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우리에게는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우주 만물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해드리며 관리자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성공의 근본을 다 갈아엎고 관계의 회복이라는 하나님의 것으로 다시 흙갈이해야겠습니다.
통계청에서는 10년 단위로 종교현황을 조사해서 발표하는데 2005년 5월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개신교인은 861만 명으로 1.4% 감소하였고 반면 천주교인은 514만 명으로 74.4% 증가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에 대해 미래목회포럼에서 최현종 박사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종교적 성스러움(62.6%), 신뢰성 및 청렴성(51.9%), 사회봉사 이미지(46.5%), 덜 부담스러운 분위기(46.5%), 다른 종교에 대한 열린 태도(34.2%), 제사 및 주초문제(35.3%)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개신교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진실성이 부족하고 이웃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적어 교회 밖에 대해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5년 종교 통계가 나오면 교계는 또 한 번 매우 놀랄 것입니다. 천주교는 무서운 속도로 부흥하고 있지만 도리어 기독교는 쇠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성공이 모여서 공동체의 성공이 이루어집니다. 교회의 심각한 현실을 체감하고 관계의 회복이라는 성공을 위해 모두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사람들에게 ‘당신이 거룩한 사람입니까?’라고 물으면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거룩한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10:10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1:15~1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19:6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림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사62:12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거룩하다고 말하기는 송구스러운 일이지만 그 근본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내용의 성경 구절은 두 군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3: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수5:15
하나는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 땅에 선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을 벗어야 할 땅은 시내 산과 가나안 땅만은 아닙니다. 거룩한 땅은 어떤 특정한 장소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 서 있는 곳을 말합니다. 즉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이 거룩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나 기도원만이 거룩한 곳이라 고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반드시 그런 곳을 찾아야만 할 것입니다.
가정, 직장, 학교, 일터 등의 모든 삶의 터전은 우리를 거룩하다고 하신 하나님 때문에 거룩한 땅이 됩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신을 벗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해야 하며 이곳이 거룩하다는 선포에 걸맞은 곳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내가 아는 한 집사님은 믿음을 갖기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얼마나 놀랍게 신앙이 성숙하였는지 모릅니다. 이분은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기도를 많이 할 양으로 기도원을 찾곤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난 지금은 자신의 방 침대 모퉁이 옆에서 조용히 앉아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매우 좋아졌다고 합니다. 날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많은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 하시는데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들어보면 절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성도들에게 교회에 와서 기도하라고 권하고 있지만, 자신의 골방을 정해놓고 이렇게 진실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간다면 어느 곳이나 거룩한 장소로 여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삶의 모든 터전이 거룩해지려면 각각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