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누가 선교사인가2020. 3. 16. 19:45

하루에도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갑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 나름의 삶을 영위하고 있고 뭔가를 열심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을 어떻게 바라 보냐 하는 것은 우리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최첨단 무전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세상에 한 대뿐이라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물건이 될 것입니다. 그 무전기가 가치를 발휘하려면 어딘가에 다른 무전기가 있어야 하고 그 기계를 사용해서 서로 대화를 나눌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신분을 주셨는데 그 신분이 제 가치를 드러낼 때는 신분이 천한 사람 가운데 있을 때가 아니라, 나보다 더 값져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내가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고귀합니다. 그들이 고귀하다고 느껴질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나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나만큼이나 그들을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고 계시며 지금도 마음 아파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선물이어서 비록 내가 그들을 돕는 처지에 있을지라도 그것이 그들을 위한 나의 섬김이 아니라,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사입니다. 그 사랑과 긍휼함으로 그들을 대하는데 어찌 가장 귀한 선물인 복음이 전해지지 않겠습니까? 이 기본이 우리 삶에 실천된다면 선교는 저절로 될 것입니다.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내가 길을 걷고 있는데 주변에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람마다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다 구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 지나갈 때는 특별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경험되었습니다. 순간 로마서 8장 26절의 말할 수 없는 탄식(groaning)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마음이 저리고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간절함으로 그 사람들에게 하소연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때문에 너무 아파하세요. 제발 예수님을 믿으세요! 당신은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선교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볼 수 있는 사람이며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들을 품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는 날 동안 바로 우리가 이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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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개방형 공동체2020. 3. 16. 19:36

하나님께서 훗날 믿음의 아버지가 된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축복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바라크)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베라카 )이 될지라. 창12:2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이 복(베라카)은 아브라함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까지도 포함하여 그의 민족과 후손까지 이어지는 공동체를 위한 복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세계나 인류 사회를 위한 복이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거하던 소돔이 멸망할 때도 그 성읍 내에 의인 열 명이 있었다면 그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유황과 불로 말미암아 수만 명의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그 성읍에 있어야 할 단 10명의 의인의 존재는 그 공동체의 존립을 위한 아주 중요한 잣대였습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수산성에 거하였던 왕후 에스더도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땅에 거하던 모든 유대인을 살리는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여기 제시한 예들 이외에도 성경에는 개인이 그 공동체에 미친 영향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내가 속해있는 다양한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 개인이 중요합니다. 공동체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잘 알고 서로 힘을 합쳐 일을 이뤄나가기 이전에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개인이 먼저 주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회복은 곧 공동체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공동체의 회복은 그들 가운데 혜성같이 나타나서 무리를 이끌어줄 강력한 지도자가 이뤄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안고 있는 문제들을 지도자의 능력부족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공동체가 올바로 세워지고 아름답게 다듬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각 개인의 관계회복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나 자신이 회복되었는데 살펴보니 전체가 회복되었다는 고백을 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기독교 병원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다른 일반 병원보다 상처가 더 큽니다. 껍질은 기독교 병원이고 알맹이가 다른 병원과 비슷할수록 상처가 더 큽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병원을 하겠다는데 병원 사정을 알아갈수록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라는 상표를 붙였으니 어쩔 수 없이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한 해 동안 병원선교회 회장을 맡은 적이 있는데, 첫 모임 시간에 회원들과 나눈 말씀이 ‘개인의 회복을 통한 공동체의 회복’이었습니다. 전체가 바뀌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바뀌어야 하며, 주님이 소돔에서 찾았던 의인 열 명이 되어보자고 했습니다. 기독교 병원은 최고경영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이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병원이라고 이름을 붙인 곳에 안 계실 리가 없습니다. 병원의 주인이 주님이시면 흥망성쇠도 관장하실 테니, 우리는 다만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하면 됩니다. 각 처소에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 역할을 다하면 누가 보아도 기독교 병원이 되는 것이고, 내가 직장을 비난하고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으면 무늬만 기독교 병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직장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있는 그리고 앞으로 속할 모든 공동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나 한사람이 그 공동체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삶에 더 신중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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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7 개방형 공동체2020. 3. 16. 19:34

너라는 존재가 나에게 있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것 같아도 따지고 보면 그것은 나를 위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더라도 너의 그 일을 주님께서 주관하시고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너의 존재가 나에게 유익하므로 주님이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일수록 자신을 그 공동체에 마치 없어서는 안 될 존재처럼 여기곤 합니다. 그 역할이 미미할 때는 그 공동체에 소속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가도 영향력이 커지면서 도리어 사람들이 자신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합당한 대우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올바른 성경적 공동체를 이루려면 내 옆에 있는 너라는 존재가 나를 위해 주님이 주신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역할은 돋보이지 않아야 하며 잘 녹아서 공동체 전체의 색깔로 드러나야 합니다. 주님은 그 공동체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에(하나님이 그 공동체의 주인공이 되셔야 합니다.), 주인공 역할을 하고 싶은 사람이 많은 공동체를 건강하다고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 때문에 너를 여기에 두신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나중에서야 내가 왜 그랬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 선배는 내가 못하는 것을 정말 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만으로 가득한 내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그 선배를 밀어내고 미워했던 것입니다. 나도 기도하면 응답받고 각종 은사를 주셔서 신앙이 만만치 않게 좋은데, 왜 나를 가르치려고 하느냐는 반발감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깨닫고서 주님께 회개했던 기억이 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의미 없는 사람을 내 곁에 두시지 않습니다. 그 선배는 지금 선교사가 되어서 선교지에서 열정적으로 복음 전도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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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개방형 공동체2020. 3. 16. 19:31

책 ‘새로운 교회가 온다’에 보면 울타리와 우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을 울타리 안에 키우려면 우선 양들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울타리를 견고하게 쳐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알맞은 먹이와 물을 줘야 하고 양들이 밖에 나가지 않도록 적절한 프로그램들을 준비해야 합니다. 울타리에서 양을 키우는 사람은 반드시 등록 명부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프로그램들은 더는 교인들이 그들이 말하는 소위 세상에 나가지 않더라도 아주 즐거울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울타리 밖에서 방황하는 양들을 보면 우리 양 떼가 아닌(非) 그리스도인으로 보게 되며 그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기에 앞서서 자신들이 안전한 우리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갖게 됩니다. 이 우리를 가득 채우려면 양들을 억지로 끌어모아야 합니다. 온갖 좋은 구실을 대며 교회로 유인해야만 합니다.

울타리 우물
농부는 자기의 가축을 안에 넣고 이웃 농장의 가축은 바깥에 두도록 자신의 토지에 울타리를 칠 수 있다. 너무 지역이 넓어 울타리를 칠 수가 없으면 농부는 우물을 만들어서 황야에 소중한 물을 공급한다. 그러면 가축들은 여기저기 헤매더라도 죽지 않으려면 우물에서 너무 먼 곳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물 구조를 지향해야만 합니다. 양들이 아무리 먼 곳을 떠돌더라도 결국은 물을 먹으러 우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이 우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다른 양들에게도 그곳에 가면 충분한 물을 마실 수 있을 것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하고 가능하다면 그들을 데리고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 구조에서 그 우물을 마시지 않았던 다른 양들은 비(非)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미(未)그리스도인입니다. 다시 말하면 언젠가는 그 우물을 마시게 될 잠재적 일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직 신앙이 없는 사람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사람처럼 치부하는 것보다는 돌아올 여지가 있는 미그리스도인으로 부르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우물에 모이는 양들은 자발적 동기에 의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교회가 온다’라는 책을 읽다가 ‘미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를 보았습니다. 비그리스도인이라고 써야 할 것을 잘못 쓴 것으로 생각하고 연필로 ‘미’ 자를 ‘비’ 자로 고쳤습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미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보고 순간 제 생각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신자-불신자로만 봐오던 내 생각을 뜯어고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지금도 그 작업은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람을 볼 때마다 의식적으로 속으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를 되뇝니다. 혹시 아직 안 믿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랑으로 섬기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집니다.

나도 처음에는 미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내가 찾은 우물을 이분들께도 알려주고 싶습니다. Niles는 ‘기독교란 한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먹을 것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내가 뭔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누리는 것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Posted by 소겸
7 개방형 공동체2020. 3. 16. 19:30

현대의 많은 교회는 경계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서 양들을 양육합니다. 교회성장이라는 키워드가 유행하면서 서양의 큰 교회들이 하는 좋은 프로그램들을 벤치마킹해서 발 빠르게 한국 교회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교회를 벗어나지 않도록 매우 재미있고 다양한 것들을 제공해야 합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다른 교회의 교인들을 흡수하여 교회의 세를 확장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경계구조 중심구조
끌어 모으기비그리스도인등록교인 명부 성육신적미그리스도인모두가 공동체의 잠재적 일원

교인들의 수평 이동은 기독교인구 통계의 기현상을 낳고 있습니다. 2005년 개신교 인구는 약 862만 명이었는데 한국 교회는 1,200만 기독교인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습니다. 교인의 숫자는 교회의 힘이고 교단의 세력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교인이 교회를 떠나더라도 등록교인으로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경계 구조에 속한 교회들이 등록교인 명부를 중시하면서 다른 교회 교인들을 끌어모으면서 생긴 기현상이 이러한 통계에 나타난 것입니다. 338만 명의 유령 교인은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적 공동체는 중심구조를 지향해야 합니다. 그 공동체는 구성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공동체를 관찰하는 모든 사람이 자신도 그 공동체의 잠재적 일원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공동체를 통한 혜택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목마르고 헐벗었을 때 그 아픔을 함께해줄 수 있으며 넘치는 사랑이 구현되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단 총회에 가면 목사님들끼리 각 교회의 등록 교인 수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합니다. 교인 300명이 넘으면 교회가 안정적이 된다는 공식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다 보니 교회를 옮긴 후에도 교적에서 쉽게 이름을 빼버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인사도 없이 살며시 사라지는 교인도 문제입니다. 2012년 교단별 통계를 보면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을 제외한 대부분 교단의 교인 수가 줄었습니다. 실제 교인 수는 줄어드는데 수평 이동에 의해 기독교 인구가 느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나를 선교사로 파송한 교회에서 수년간 가정교회 시스템을 시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체계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수평 이동하는 교인은 받지 않고, 오직 새 신자만으로 교회가 성장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행과정에서 진통도 많았지만, 교회를 새 신자로 채우겠다는 강한 집념은 높이 살만하다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소겸
7 개방형 공동체2020. 3. 16. 19:06

어떤 사람이 손님의 입장으로 한 기독교 공동체를 방문했다면 그 구성원들에 의해 판단된 그 사람의 가치에 따른 접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오는 사람마다 그 가치에 맞는 접대를 한다면 아마도 삶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특히 대접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이 올수록 그 공동체는 시간, 재정 그리고 노력 등의 낭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공동체의 지체들이 서로 좋아서 끼리끼리 지내기만을 고집한다면 울타리 공동체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기란 너무도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 공동체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지겠지만, 세상을 변화시킬 공동체를 꿈꾸는 것이 필요한 시대가 왔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잘 구현해내지 못하는 시대가 되어 세상으로부터 수많은 질타를 받고, 여기저기서 기독교의 비리가 드러나고 내분이 일어나는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교회가 새로운 대안을 찾아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중심 구조의 모델에서는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우물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 공동체가 혜택을 누리고 있는 쉼 없이 샘솟는 우물을 공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우물은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 물을 마시는 자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의 강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중심 구조 공동체의 지체들은 그곳에 누가 찾아오더라도 분주하게 호들갑을 떨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일상의 삶이 바로 복음이며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들을 접하는 사람마다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각자가 맡은 바 임무를 고요하게 수행하는 가운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누구라도 존귀하다는 가치관에 따라 차별 없이 대한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이 위로를 얻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들의 평범해 보이는 삶이 강한 메시지로 나타나서 결국은 잃어버린 자로서의 그들의 처지를 청산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어떤 사역보다 더 큰 일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품질의 유기농 농산물을 생산해내는 단체는 우리가 이단으로 여기는 공동체입니다. 통합의학적 암 치료를 위해 보완대체의학을 시행하면서 환자의 면역을 올리기 위한 좋은 품질의 건강 보조 식품을 찾다가 연결된 곳입니다. 유사 제품이 있지만, 그 효능을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그곳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채식을 하고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합니다. 여럿을 만나보았는데 누구도 비만하지 않고 건강해보였고, 성품도 아주 친절하고 온화했습니다.

그들보다 훨씬 큰 기독교에서 이런 제품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하는 수 없이 그쪽 제품을 써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한때 담당하는 박사님한테 다른 회사 것을 써야하는 게 아니냐고 의견을 내기도 했지만 품질 차이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다는 답을 들어야 했습니다. 제대로 된 공동체라면 이렇게 실력으로 승부해야합니다. 세상은 절대 만만치 않으며 우리가 얼마나 큰 내공을 가졌는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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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7 개방형 공동체2020. 3. 16. 19:06

현대사회는 개인주의 물질주의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그들의 안전을 공동체에서 찾았던 과거와는 달리 물질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각종 보장성 보험과 연금 상품이 난무하고 상조회사 같은 것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현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신뢰는 거의 종교적 수준으로, 쓰지는 않더라도 쌓아놓은 금력은 심리적 안정을 가져다 줄 정도입니다.

이러한 사회 현상에 대한 개혁은 본질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통해 이룰 수 있습니다. 돈의 권력에 빼앗겨버린 공동체의 고유한 역할들을 되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허락하신 서로 사랑하며 세워가는 성경적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이미 붕괴하였고 지금도 야금야금 그 입지를 빼앗겨가는 공동체의 고유한 역할들을 조금씩이나마 지켜내야 합니다.

개인주의가 만연하여 주위에 수많은 적이 진을 치고 있는 전쟁터와 마찬가지인 위기의 시대에 살아가면서 어디를 돌아보아도 나를 위해 생명이라도 바쳐 도울 친구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는 아군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내 심장에 비수를 꽂기도 합니다. 이런 험난한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같이 돈을 의지하며 맘몬을 숭배하지 않는다면 택할 길은 공동체밖에 없습니다. 나 혼자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거대한 싸움에서 살아남는 길은 너와 함께하는 길뿐입니다.


선교사 허입 과정에서 보험을 꼭 들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걸고 선교지로 가는데 하나님을 더 의지해야지 보험에 가입해서는 되겠는가 하여 아내와 상의를 했지만, 단체의 규정이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미국 회사의 생명보험에 가입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선교사가 은퇴하거나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에 돌아오게 되면 상황이 많이 어려워집니다. 국내에 있다는 이유로 후원금이 끊기게 되고 당장 먹고 잘 곳을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회사에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생산 활동을 하려 해도 자본이 없어서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선교사를 선교지로 보낸 교회조차도 그들을 품어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원은 풍부한데 서로 나누지 않아 쏠림 현상이 생겨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생깁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돈 이외의 안전장치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예전과는 달라 우리도 노후를 염려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에 소속해 있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세상에서 그 이상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공동체밖에 없습니다.

Posted by 소겸
7 개방형 공동체2020. 3. 16. 19:05

오늘날 기독교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은 심상치 않습니다. ‘개독교’이라는 말이 일반인이 기독교인을 일컫는 은어가 되어서 정통, 이단을 불문하고 다 한통속으로 취급받습니다. 기독교인이 신뢰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어서 우리는 지금 성직자라고 해서 우러러보거나 더는 존경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지혜를 주시니까 그걸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속여먹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제자들이 훈련받는 방식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고 바울도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디모데에게 자신들을 본받을 것을 말했습니다.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살후3:7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딤후1:13

지금 이 시대는 이 본을 찾아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렇게 많이 존경하고 따랐던 목사님인데 상상하지 못할 사건이 빵빵 터지면서 사람들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갑니다. 목사님도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 마음의 상처를 가다듬기는 역부족입니다. 이런 소식이 세상에 전해지면서 교인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타락해가는 세상에서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종교인들의 타락은 터 큰 비난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와 교회의 잘못으로 깎인 점수를 다시 찾는 것은 그간 해왔던 노력 정도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뭔가 혁신적인 대안이 있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큰 문제입니다. 주님 오실 날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시간의 임박성 앞에 발만 동동 구르며, 이상하게만 꼬여가는 세상과의 관계를 그냥 지켜보다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더 교회 안으로 모여들어 뭉치는 현상이 생긴다면 그것은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제자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이 심각한 시대적 문제의 해결책은 바로 공동체에 있습니다. 이제까지 해봤는데 안 된다면 과감히 돌아서야 합니다. 사랑이 흘러넘치는 공동체는 분명히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있습니다. 서로 격려하며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쉼 없는 노력이 쌓여서 구성원들은 점점 성숙해갈 것이고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좋도록 변해갈 것입니다.


반기독교 세력은 조직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생기는 온갖 불미스러운 일이나 목회자 관련 뉴스가 나오면 인터넷상에서 부정적 여론을 형성합니다. 2010년에는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라는 광고가 버스에 나붙기도 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기독교의 교리와 성경을 비판하면서 기독교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엄청났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12사도를 비롯한 수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순교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또 영지주의 같은 이단이 생겨나서 기독교를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독교는 계속 승승장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려움을 당할수록 더 뭉쳤고 함께 문제를 풀어나갔습니다. 지금 분열되어 서로 싸우느라 바깥을 돌아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절실한 과제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Posted by 소겸
7 개방형 공동체2020. 3. 16. 19:05

‘공동체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폐쇄 공동체를 생각합니다. 세상은 험하니 맘에 맞는 그리스도인끼리 모여 사는 은둔 생활을 떠올리기가 쉽습니다. 세상과 벽을 쌓고 그 안에서 자급자족하면서 하나님만 바라보면 사는 것은 수도원의 영성입니다. 그 수도원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대단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동체는 ‘개방형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 널리 열려 있어서 누구라도 이곳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공동체가 가진 유형무형의 자원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공동체를 허락하신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 존재가 세상에 대해 복음의 능력을 행사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일원은 단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뿐이더라도 각 개인이 모여 형성된 이 공동체의 위력은 세상을 뒤집어엎을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누구나 이 공동체에 노출되면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얻고, 마음이 치유되어 이웃과 화평을 이루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더는 끼리끼리 모이는 공동체에 집착하지 말고 담대함으로 세상에 열린 공동체를 만듭시다.


군의관으로 재직 중에 초대를 받아서 한 기독교 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휴전선이 가까운 전방의 한 산골에 위치한 이 공동체에는 7~8가정이 모여서 살고 있었습니다. 농사를 같이 짓고 식사도 같이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밝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공동체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터라 잘 모르긴 했어도, 그들이 거기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타락한 세상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성경적으로 꾸려가는 그 마을의 이념은 매우 훌륭해 보였습니다.

이런 공동체의 문제는 외부에 대해 배타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영향력이 공동체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기 때문에 갖가지 안전장치를 두고 폐쇄적은 형태를 띠게 된다면 자신들의 신앙 성숙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데는 분명 지장이 있을 것입니다. 건강한 공동체를 형성해 심지가 견고해져서 세상을 향해 개방된 공동체가 더 이상적인 형태입니다.

Posted by 소겸
7 개방형 공동체2020. 3. 16. 19:03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덕목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 모여 하나가 되는 일은 진통의 연속일 것입니다. 나와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이 미울 수도 있고 내 의지대로 돌아가지 않는 일들이 마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모두 공평하게 나누어야 하지만 누군가는 더 가져가는 모습이 보일 것이고 또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뜻으로 모인 사람들이 얼마 못 가서 흩어지는 현상들이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알려주셨습니다. 새 계명이 있다는 것은 소위 ‘옛 계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새 계명: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4

옛 계명: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19:18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19:34

옛 계명과 새 계명의 큰 차이점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계명이 있음에도 굳이 새 계명을 언급하신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시범을 보이시면 ‘내가 한 것처럼 너희도 따라서 하라!’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은 당신이 우리를 위해 직접 희생을 당하셨고 기꺼이 죽기까지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은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자기 죽음의 사랑입니다. 내가 죽으면 싸울 일도 없고 경쟁과 시기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화평만 존재할 뿐입니다.

따라서 공동체를 유지하는 핵심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속성이 공동체가 잘 녹아 세상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자!

존중하자!

아낌없이 섬기자!

우리의 이런 결심을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모두 행복해질 것입니다.


학생 시절 기독학생 모임의 대표를 하면서 후배들과 꽤 많은 상담을 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후배들이 마음에 감동하여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곤 했으며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친구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셔서 그들이 꼭 들어야 할 말을 전달하였다는 것에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몇 달이 지나도 그 후배들은 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옳은 말을 한 것은 분명한데 사람을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럴까?’ 하고 많은 생각을 해보고 기도도 했는데, 그때 깨닫게 된 것은 사랑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사랑 없이 하면 그 말에 능력이 없어서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조언하거나 꾸짖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어린 나의 다섯 자녀도 사랑으로 훈계하는 것과 감정이 상해서 혼내는 것을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고, 자녀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끈끈한 결속력의 원천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맺어진 사랑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꿈꿔야 할 공동체도 이렇게 십자가로 경험하는 자기 죽음과 사랑에 근거한 건강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Posted by 소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