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는 성속주의와 평신도 성직자를 나누는 로마 가톨릭의 비성경적 문제를 직시하고 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 당시 중세사회에서는 제도 교회와 종교 의식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교회나 사제의 영향력은 대단했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그가 주장한 것은 만인제사장설입니다. 그는 모든 성도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 갈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나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왕 같은 제사장임을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믿는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직업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고 역설하며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분되는 이원론적 구조를 전면 부인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제나 수사 등의 종교적 지위가 평신도보다 더 높다는 성직우위론의 주장이 뒤엎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16세기 이후 부패하고 타락한 중세교회를 전면적으로 개혁하였고, 중세의 이원론적 가치체계를 전복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장로교의 한 교단 총회가 열리는 자리에서 봉사하는 장로님이 참석한 한 목사님께 ‘성도님, 이쪽에 와서 앉으시죠.’ 이렇게 말했더니 그 목사님이 노발대발하면서 ‘난 목사인데, 성도라뇨?’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도라는 호칭은 우리에게 아주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성도의 영어표현은 saint인데 ‘성도 김철수’라고 불려 진다면 중세의 훌륭했던 수많은 성인과 같은 호칭을 받는 것이니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어떤 교회에서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을 ‘성도 아무개’라고 부르는 곳도 있고, ‘성도 아무개 목사’, ‘성도 아무개 집사’ 이렇게 부르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목사라는 직함은 역할을 말하는 것이지 계급이 아닌데, 스스로 ‘섬기는 종’으로 자처하면서 어른 대접을 받으려 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지각 있는 많은 목사님이 이런 인식을 하고 평신도나, 중직자 등의 단어를 지양하고 모든 성도를 귀하게 여기는 모습은 참 고무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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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존재하는 성속의 개념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거룩 세속
하나님 말씀(신학)
교회, 예배당(건물)
성직, 교회 봉사
성직자
주일
세상의 학문
세상
직업, 학업
평신도
평일

교회는 성도들에게 종교 개혁 이후 타파된 이원론의 잔재를 다시 가르치고 있으며 이런 현실을 도리어 교회의 안정적인 구조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예배당이라는 용어는 교회를 예배드리는 처소로 이해하며 구약시대의 성전과 동일시하는 개념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순간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찢어짐으로 이제는 제사장 직분을 가진 모든 성도는 지성소를 목격하는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역행해서 성전을 세우기를 힘쓰는 교회가 성경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또한 종교개혁 이전으로 돌아가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직이라 부르는 목회자는 지체의 역할을 말하는 것이지 계급은 아닌데 교회에서는 여전히 당회장, 부목사, 장로, 권사, 안수 집사, 서리 집사, 권찰 등의 서열이 메겨지고 특히 신학교 출신의 목회자는 교회 내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며 상호 협력 하에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가는 교회의 리더십이 절실하다고 하겠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교회에서 봉사하도록 권유하면서 교회에서 하는 봉사는 거룩한 것이며 직업은 세속적이라는 개념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각자가 지닌 직업에 소홀히 하면서까지 교회 봉사에 열심을 보이는 양태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교회는 굳이 이런 현상을 말리려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교인의 열심 있는 신앙으로 남의 모범으로 삼으려 해서 세상 직업과 교회의 봉사가 더욱 양분화의 길에 서게 됩니다.

학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학문의 주인임에도 교회는 신학만이 하나님의 학문이라는 견해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자연과학, 예술, 문학, 언어, 철학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영역이 아닌 것이 없음에도 신학만 붙들고 하나님의 학문을 운운하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창조과학회가 과학 또한 성경적이라는 증명을 해 보이며 열심히 활동하듯이 넓은 시각으로 하나님의 피조 영역을 구속하는 노력이 전 학문에 골고루 나타나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의 전에 나와 기도하시면 하나님께서 더 잘 들어 주십니다.’

‘세상의 직업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일이 교회에서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입니다.’

‘평일 내내 세상에서 찌든 영혼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서 말씀을 충전하고 새 힘을 얻어 다시 세상에 나가야합니다.’

교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들인데, 다시 한 번 이런 말들에 대해 재고를 해봐야 할 것입니다. 김규욱 목사는 포괄적인 세계관에 의해 삶의 전 영역이 하나님을 배우고 경외하는 신앙생활이요 예배생활이라는 기독교 진리의 확산이 너무도 절실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속을 논하며 교회와 세상을 구분 짖는 우리의 신앙 행위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졸속한 것인지를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본과 1학년 때 들었던 원종수 박사님의 간증 테이프 중에 세상의 지식이 들어가기 전에 성경을 봤다는 말이 인상적이어서 한동안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성경을 한두 장씩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만해도 성경과 신학만이 하나님의 학문이고 의학은 세속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했었습니다. 내가 공부했던 학문을 완전히 하나님 것으로 구속할 수 있었다면 좀 더 제대로 된 의사가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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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교회에서 듣는 세상에 대한 영향력은 세속적인 성공 주의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목사님들은 성도들을 향하여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에 들어가도록 기도하고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도 높아지길 축복합니다. 믿음생활을 하면 만사가 형통하다는 공식을 입증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흔하게 들어볼 수 있는 말이 세상에 대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서라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높은 직위에 오르거나 많은 재물을 갖는 것이 복음을 전하기가 쉽다는 논리입니다.

세상에 대한 영향력은 내가 가진 재물과 권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관점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따라가기 위한 교묘한 술수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뭔가를 해내고 있다고 생각할 때 주님은 그 자리에 안 계십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다른 가치관을 갖고 세상에 맞서야만합니다. 겸손히 그분의 역사를 바라며 내게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는 일만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주를 따르는 신앙인도 세상의 가치관과 똑같은 성공을 이루려고 애를 씁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부와 명예를 누리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과도한 교육열을 보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남을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생의 패배자처럼 여겨지는 절실함 속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와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조차도 모른 체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학교에 진학하거나 직장에 취업하는 문제도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느냐에 대한 것 이전에, 그러한 결과물이 나오는 과정에서 얼마나 하나님이 개입하셨는가에 관심을 둬야 합니다. 진정한 세상에 대한 영향력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몫이며 우리는 다만 순종할 뿐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보면 한국인의 정서에 배어있는 성공 주의가 교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성공하는 길은 세상이 알아주는 권위와 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훌륭한 성공은 바로 하나님의 성공입니다. 하나님이 성공하시면 그 자녀 또한 성공의 반열에 이르게 됩니다. 성공에 대한 성경적 가치는 세상이 바라보는 그런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잘 회복되어 가는가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날씨 좋은 토요일에 인근의 교회 성도들과 교회대항 축구 경기를 했습니다. 그 경기에서 이기면 받게 되는 상품은 꽤 좋은 것이어서 다들 최선을 다해 운동장을 뛰어다녔습니다. 응원하던 성도들은 각자 자신의 교회 팀이 이기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각각 우리 편이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과연 어느 편의 기도를 들어주셨을까요? 우리 편이 이기게 해달라고 한 기도 자체가 난센스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심이 더 깊고 더 간절히 기도한 팀이 이기도록 돕지만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그 게임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동안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기며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지에 대한 것이지 어느 팀이 이길 것인가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는 이긴 팀도 진 팀도 없으며 다만 그 과정을 통해 각 성도가 더 성숙해지는 성공을 이루길 바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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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당신은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성공하길 원한다면 세속적이지 않으냐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이고,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솔직하지 않다고 비난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확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성공을 이뤄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이 바라는 성공에 대한 정의가 있겠지만 정작 우리가 바라고 이뤄야 할 성공은 따로 있습니다.

85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가신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님은 아름다운 일화를 많이 남기셨습니다.

어느 해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 박사님 곁에서 자고 난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 손동길 씨가 잠자리를 정돈하고 먼저 세배를 올렸습니다. 박사님은 그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금년엔 날 좀 닮아서 살아보아.” 하고 덕담을 주셨습니다. 박사님의 큰 사랑에 어리광을 잘 부리던 제자는 “선생님 닮아 살면 바보 되게요.”라고 했습니다. 박사님은 껄껄 웃으시며 “그렇지, 바보 소리 들으면 성공한 거야. 바보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나?”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세상에서 바보로 사는 것이 성공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바보가 된다는 것은 세상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할 만한 다른 법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성공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가치관은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성공은 세상의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들 앞에 선한 사람이 되어 칭찬을 듣고 신앙도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추구해야 할 성공은 ‘하나님의 성공’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병원 신우회 모임의 회장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매주 모였는데 처음 나오는 직원이 있으면 간단하게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곤 했습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자매님은 어떤 성공을 이루길 원하시나요?”

이 질문에 저마다 자신의 소신에 맞게 다양한 답변을 합니다.

“저는 열심히 일하고 많이 배워서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어요.”

간호사의 당찬 대답이 아주 시원시원하니 듣기가 좋았습니다. 그 자매가 생각하는 성공은 자신이 맡은 업무에서는 최고가 되고 싶다는 야무진 꿈이었습니다. 어떤 자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환자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따뜻한 간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이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할 법한 좋은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형제는 솔직하게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 내 필요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겠냐고 말하면서 좋은 신앙을 가진 직장인이 되길 소망한다고 꿈을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성공에 대한 다양한 가치관이 있습니다. 모두 존중해주어야 할 귀한 생각이겠지만 그 가치가 세상의 것과는 구분되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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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뤄야 할 성공은 내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공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성공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공은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성공이란 하나님의 헤아림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경주를 마친 후에 사람들이 나에게 성공했다고 평가를 한다면 그것은 보이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공을 했느냐를 나타내는 척도를 발견해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관점에서의 성공이 바로 하나님의 성공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우매한 일일 지를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성공은 사람에게 평가되지 못할 고유한 영역을 지닙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결과들로 형제를 판단하며 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성공은 일의 성취가 아니라 관계에 있습니다.

흔히들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어떻게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까를 고민을 하는데, 문제는 그 고민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영역임에도 내가 열심히 하면 뭔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서 나의 뛰어난 영성과 믿음이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였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주가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못 하셔서 나에게 맡기신 것인가 아니면 나의 유익을 위해 나에게 허락하신 것인가?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도 관계를 맺길 원하고 계십니다. 하도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라도 관계를 맺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성공은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가장 통합적인 것을 꼽으라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이라도 낙원에서 자녀 된 우리와 가장 좋은 시간을 보내시길 원하시지만, 아직 채워야 할 사랑이 남아있기에 우리에게 사랑할 사명을 주시고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성공하는 길은 받은 그 사랑을 흘러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 가운데 제일은 사랑입니다. 내 의지가 아니라 이미 겪은 사랑에 감격하여 차고 넘치는 사랑이 되려면 내 죽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성공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의 가장 큰 자랑을 기억합니까?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바울도 자랑했습니다. 그 자랑의 내용은 분명히 우리가 바라는 성공과 같은 내용이어야 할 텐데, 놀랍게도 그 내용은 바로 ‘날마다 죽노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지신 십자가는 얼마나 큰 위안이 됩니까? 그분의 몸소 실천함이 있었기에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 죽음을 통해 우리는 성공에 이르게 됩니다.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야 할 진정한 성공은 사람들의 눈에 있지 않고 바로 하나님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빙자한 나를 위한 성공을 내어버리고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성공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감사하고 기쁨이 충만한 사람의 어깨에는 늘 십자가가 얹혀져 있습니다. 그 사람을 향해 미련하다고 하지 말고 나 자신을 돌아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도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온갖 야유를 보내고 조롱하지 않았던가요?

나의 전문분야는 복강경 수술입니다. 임상강사를 마치고 병원에 봉직의로 처음 부임하자마자 단시간 내에 수백 건의 충수절제술을 했는데, 지금은 보편화가 되어있지만, 그 당시에는 복강경으로 그 수술을 하는 의사는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한 복강경으로 대장암 수술, 담도절제술, 비장절제술, 위 수술, 탈장 수술 등 다양한 수술을 성공적으로 감당했는데, 외과의 거의 모든 영역의 수술을 복강경으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합병증 발생률도 매우 낮아서 직원들 사이에 수술 잘하는 의사로 좋은 평이 나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선교사가 되기 위해 직장을 관둔다니 많은 분이 의아해하셨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권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선후배나 교회 성도들이 좋은 직장을 포기하고 선교사가 된 것을 부러워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외과의사로서 또한 신앙인으로서의 성공을 이루어가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내가 정작 마음 깊은 곳에서 생각하는 성공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선교사가 되려는 것조차도 나의 성공을 이루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Posted by 소겸

관계의 회복은 하나님과 이웃과 그리고 우주 만물과의 사이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담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부여하신 ‘생기’로부터 생명이 생겨나고 전인적으로 지어졌습니다. 온 천하 우주에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 아담이 필요하셨던 이유는 그와 교제하기 원하셨고, 그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살아 존재하는 동안 가장 힘써야 할 성공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담과 같이 친밀해지는 것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것이 해결된다면 덤으로 지혜도 주실 것이고 능력도 주셔서 맡은 일을 잘 감당할뿐더러 사람들을 전인적으로 살리는 일을 해내게 하실 것입니다.

두 번째의 회복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화평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2:13~14

온갖 죄악과 피로 물든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 경쟁하고 남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원수가 되는 것을 꺼리지 않습니다. 모든 욕심을 내어버리고 내 주변의 모든 이웃과 사랑하며 섬기는 관계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의 회복은 자연과 온 우주 만물과의 관계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우리에게는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우주 만물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해드리며 관리자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성공의 근본을 다 갈아엎고 관계의 회복이라는 하나님의 것으로 다시 흙갈이해야겠습니다.

통계청에서는 10년 단위로 종교현황을 조사해서 발표하는데 2005년 5월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개신교인은 861만 명으로 1.4% 감소하였고 반면 천주교인은 514만 명으로 74.4% 증가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에 대해 미래목회포럼에서 최현종 박사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종교적 성스러움(62.6%), 신뢰성 및 청렴성(51.9%), 사회봉사 이미지(46.5%), 덜 부담스러운 분위기(46.5%), 다른 종교에 대한 열린 태도(34.2%), 제사 및 주초문제(35.3%)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개신교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진실성이 부족하고 이웃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적어 교회 밖에 대해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5년 종교 통계가 나오면 교계는 또 한 번 매우 놀랄 것입니다. 천주교는 무서운 속도로 부흥하고 있지만 도리어 기독교는 쇠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성공이 모여서 공동체의 성공이 이루어집니다. 교회의 심각한 현실을 체감하고 관계의 회복이라는 성공을 위해 모두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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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당신이 거룩한 사람입니까?’라고 물으면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거룩한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10:10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1:15~1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19:6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림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사62:12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거룩하다고 말하기는 송구스러운 일이지만 그 근본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내용의 성경 구절은 두 군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3: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수5:15

하나는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 땅에 선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을 벗어야 할 땅은 시내 산과 가나안 땅만은 아닙니다. 거룩한 땅은 어떤 특정한 장소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 서 있는 곳을 말합니다. 즉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이 거룩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나 기도원만이 거룩한 곳이라 고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반드시 그런 곳을 찾아야만 할 것입니다.

가정, 직장, 학교, 일터 등의 모든 삶의 터전은 우리를 거룩하다고 하신 하나님 때문에 거룩한 땅이 됩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신을 벗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해야 하며 이곳이 거룩하다는 선포에 걸맞은 곳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내가 아는 한 집사님은 믿음을 갖기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얼마나 놀랍게 신앙이 성숙하였는지 모릅니다. 이분은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기도를 많이 할 양으로 기도원을 찾곤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난 지금은 자신의 방 침대 모퉁이 옆에서 조용히 앉아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매우 좋아졌다고 합니다. 날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많은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 하시는데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들어보면 절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성도들에게 교회에 와서 기도하라고 권하고 있지만, 자신의 골방을 정해놓고 이렇게 진실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간다면 어느 곳이나 거룩한 장소로 여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삶의 모든 터전이 거룩해지려면 각각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만 합니다.

Posted by 소겸

 

집회나 강의가 있을 때마다 모인 분들에게 꼭 내는 퀴즈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이 퀴즈를 풀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길동이에게는 네 명의 친한 그리스도인 친구가 있었습니다.

철수 : 맛있는 먹을거리가 생기면 잊지 않고 길동이를 챙겼습니다.
영철 : 가끔 길동이를 만나 어려운 문제가 있지는 않은가를 묻고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곤 했습니다.
영희 : 길동이의 구원을 위해 잊지 않고 날마다 골방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순희 : 어느 날 가 길동이를 찾아가 예수님을 믿으라며 복음을 전했는데, 그는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께 질문하겠습니다.

“여기 네 명의 친구 가운데 누구 때문에 길동이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나요?”

여러분은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많은 사람이 복음을 전한 순희나 골방에서 기도한 영희를 지목합니다. 생각이 좀 깊으신 분은 모두가 정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 때문에’라는 질문의 정답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이 구원 사역의 절대 주권자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

그럼에도, 우리 교만한 인간들은 자신 때문에 몇 명 몇 명이 구원을 받았다고 숫자를 세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우리가 다양한 형태로 조금이나마 쓰임 받음으로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였다는 사실을 영광으로 여겨야 합니다.

여기서 제시한 중보기도나 사랑의 섬김 등은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다 모여서 한 작품을 만들게 되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십니다. 한 친구 길동이를 살리시기 위해서 사랑의 하나님은 주변에 그 사람들을 두셨습니다.

또한, 그의 친구 각 개인은 한 사람 길동이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고 기도하고 전도할 대상을 내게 두신 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이며 은혜를 주실 기회입니다. 결국, 나를 유익하게 하시려고 내가 섬겨야 할 사람이 내 앞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두를 유익하게 하시는 한량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학창 시절 주일 오후에는 병원교회에 가서 봉사하였습니다. 예배는 병원의 로비에서 드렸기 때문에 몇 시간 전에 미리 가서 의자를 정돈하고 병실을 방문하여 환자분을 모시고 내려와야 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오시거나 침대째 내려와서 예배드리는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예배 후에는 원상태로 정리해놓은 후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병실을 방문하여 환우들에게 전도하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찬양 한 곡을 하고 할머니 한 분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드렸는데, 전도지를 펴지도 않았음에도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이제부터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시면서 기도를 해달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단지 다가가기만 했을 뿐인데 예수님을 영접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내 공로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적이 있었습니다. 봉사와 전도를 통해 다른 사람이 내 도움을 받았다기보다는 먼저 나에게 큰 유익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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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누구에게나 일하는 직장이나 학교, 교회, 지역, 동문회, 친척 등 우리가 소속된 여러 종류의 공동체 내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기분 좋은 일입니다. 게다가 성품까지 좋아서 대인 관계가 원만하고 남의 어려운 일을 돕기를 늘 힘쓴다면 자신을 스스로 그 공동체 내에서 더 중요한 존재로 여기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만약 더 나아가서 ‘내가 없으면 이 공동체는 제대로 돌아가지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신념입니다. 모든 일의 중심에는 늘 하나님이 계시며 지금 이 순간도 그 일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느낄수록 본인이 없으면 그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거나 큰 타격을 입을 것 같다고 생각하겠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자신이 굳이 그 각각의 공동체에 속해 있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 일을 하라고 거기에 두시기 전에 그 사람들과 일 가운데서 하나님과 더 친밀해지라고 베푸신 섭리 가운데 두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겪는 어려움이나 감사한 일 가운데 하나님을 찾습니다. 동료를 위해 중보를 하고 사랑으로 섬길 지혜를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일을 그렇게 잘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그 공동체 가운데 두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온전해지고 하나님이 나를 유익하게 하시려고 계획하신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 교회에 매주 꽃꽂이 봉사를 하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수년 동안 한주도 빠짐없이 헌신적으로 강단에 아름다운 꽃들을 장식한 이 집사님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한 주는 몸이 아파서 다른 분이 대신 꽃꽂이를 했답니다. 그 분은 유명한 꽃꽂이 학원 강사였었다고 합니다. 그다음 주에 나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이 빠졌던 그 주에 해놨던 꽃꽂이가 정말 대단했다고 성도들이 극찬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은 그 집사님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당장 교회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시작한 봉사가 오래가면서 이런 잘못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계신 분일수록 더욱 겸손해지길 노력하고 열심히 일한 후에 무익한 종일뿐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을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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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는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내 평생에 몇 명을 전도했다고 떠벌리는 사람보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도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값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마치 자신이 해낸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면 이미 상을 받아 버린 것이 되어 하늘에 남겨지는 상은 없어질 것입니다.

기독교 서점에 가면 ‘OOO 전도왕’이라는 책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전도하는 분들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 전도의 열매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권은 분명히 주님께 있는 것인데 내가 전한 복음을 들은 사람의 수를 세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한 영혼이 주께 돌아오기까지 수많은 성도의 기도와 사랑의 섬김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오케스트라와 같이 아름다운 협력이 필요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4:2

항상 힘써야 할 복음 전도를 수로 표현하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함정에 빠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숫자에 연연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수천 명이라도 주님께 돌아오게 하실 수 있는 분인데 몇 명을 전도하고 교회를 몇 개 세우고 몇 명을 도왔다는 이런 우리의 자랑이 얼마나 가소롭겠습니까? 다 주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하면 될 것을 하나둘 숫자를 세는 우리 모습을 보면서 주님은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10여 년간 사역하고 나오신 한 선교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사역 동안 단 한 명의 회심자만 얻었을 뿐이라고 고백하시던 것을 기억합니다. 지금 캄보디아에서는 대부흥이 일어나서 집회 때마다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이 주님께 돌아온다고 합니다. 숫자의 논리라면 열매 맺고 인정받고 싶은 선교사는 캄보디아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선교사에게 왜 열매가 없느냐고 다그치면서 교인 수를 보고하라고 하므로 그 힘든 곳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10년 사역한 선교사님은 능력이 없고 심지어는 불성실한 사역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필리핀의 한 사역자에게 한국 교회에서 교회를 지어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넓고 좋은 교회에 교인이 많지 않은 것을 보고 교회에서는 정기적으로 예배드리는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교회를 지어줬는데 왜 교인이 안차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선교사는 고민하다 못해 선교비 일부를 할애해 현지인들을 그 자리에 앉혀놓고 사진을 찍어 보내기 시작했고, 나중에 이 사실이 발각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하나님 일을 하면서 숫자를 과감히 버린다면 더 온전한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더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여건이 될 것입니다. 숫자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노력을 중단하고 주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갓 전문의를 따고 한 종합병원에 취직해서 일하기 시작했을 무렵 수년 후에 선교지에 나가야겠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에 제자 훈련, 말씀 묵상 뭐든 다 열심히 했었습니다. 그곳이 선교지이고 여기서 선교하지 못하면 어디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진료 현장에서 환자에게 전도도 열심히 했었는데 그 수가 많아져서 엑셀 프로그램에 간단한 인적사항을 적고 전도한 날짜와 영접 여부를 기록하여 월별 통계를 내기도 했습니다. 매달 이런 자료들을 살펴보면서 이 자랑할 만한 좋은 열매들을 흐뭇해하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생각이 얼마나 유치하고 교만했든가 하는 맘이 듭니다. 훗날 마치 내 공으로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던 나의 모습을 회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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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목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갈급해하는 이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은 갈증을 없앨 수 있도록 물을 갖다 주는 일일 것입니다. 가져다주는 것에 더해 지극한 정성으로 손수 컵을 기울여 먹여줍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신 사람은 그 사람의 섬김에 감사한 마음을 가질 것이고 마찬가지로 사랑의 섬김을 받았다고 느낄 것입니다.

흘러넘치는 사랑은 이것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상대방이 갈증을 느끼기 이전에 먼저 자신이 목말라야 합니다. 그 갈증이 난 목을 축여주시도록 주님께 구하면 우리의 필요를 정확하게 알고 계신 사랑의 주님께서 분명히 그 소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많은 물을 달라고 구합니다. 우리의 간구에 합당하게 주님은 가득 그리고 차고 넘칠 만큼 내 잔을 채울 것입니다. 급기야는 그 물이 주변을 모두 촉촉이 적시는가 싶더니 이젠 강물처럼 불어 오릅니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충만한 흘러넘침으로 갈증이 해소되는 것입니다.

컵을 기울여 먹인 사람은 자신이 물을 먹였다고 생각하겠지만,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흘러넘치는 사랑을 구현한 사람은 주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이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또한 내게 있는 것을 떼어 조금 나누어주기보다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차고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주변을 충만하게 적셔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흘러넘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하면 할수록 주님과 더 친밀해지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4:16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2:4

의예과 신입생 때 간호학과 선배가 밥을 사주겠다고 해서 병원 앞 식당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그 선배가 컵에 물을 따르기 시작했고 꽉 찼음에도 멈추지 않고 식탁이 흥건하게 젖도록 부었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하는 거야!’라며 차고 넘치는 사랑에 대해 설명해주시던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매이는 게 싫어서 기독학생 동아리에 들어갔어도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중이었는데, 선배들이 나에게 베풀어준 사랑은 평생 처음 겪어보는 것들이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의 방황은 내 닫힌 마음을 열어준 선배와 동기들의 사랑 때문에 쉽게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그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기독학생회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수년간 교회를 다녔어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었는데, 그 모임을 통해서 많은 신앙체험을 할 수 있었고 예배와 훈련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날 사랑하고 계심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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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일을 한다는 것을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해 드리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내가 누구누구를 먹였고 누구누구를 위해 기도했고 누구누구를 위해 복음을 전했다고 말하며 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는 무슨 일을 했는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 이러이러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고 자랑합니다.

바로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런 관점은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그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면 내가 무엇을 해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하나님이 전하신 것입니다.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함에도 우리가 그 전부 혹은 일부를 가로챈다면 그것은 자녀의 도리가 아닙니다. 특히 열심을 내는 그리스도인일수록 더 이런 함정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이런 사역을 허락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일을 잘 나타내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6:29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대답하고 계십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심을 믿는 것이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생각뿐인 허상이 아니라 우리 삶에 실체로 드러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11:1

믿음은 사람의 생각에 좌우되는 주관적 실체가 아니라 객관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확신을 더하는 근거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객관적 실체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은 종말론적 미래에 나타날 사건을 시사합니다. 이 미래지향적인 믿음은 미래를 내다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발 벗고 나서서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열심이 하나님 나라의 상급으로 이어지려면 지나친 분주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정의되는 것을 기억하고 뭔가를 하려고 일을 만들기 이전에 잠잠히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제대로 하려면 하나님만 바라보는 모습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시62:1

내가 하는 한 집사님은 교회에서 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주일에는 아침 일찍 교회에 가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주일 낮 예배에서 성가대를 섭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주방 봉사를 하고 오후 예배를 드리고 뒷정리를 하고 나면 저녁이 다 되어서 집에 옵니다. 수요일의 수요예배와 거의 날마다 새벽기도를 나가고 금요일엔 철야 기도회를 갑니다. 목요일엔 구역 모임에서 구역장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집에 있는 남편과 아이들은 엄마 없이 지내는 시간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지내다 보니, 그분의 믿지 않는 남편은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 꾹 참고 산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오늘도 남편의 영혼 구원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은 새 교회에 부임하고 나서 제일 먼저 금요철야 예배를 없앴고 주일에도 부인들이 최대한 집에 빨리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가정에 더 충실하게 되어서 그런지 평생 교회 문턱을 밟지 않았던 많은 남편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가 하여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일을 열심히 한다 해도 기본에 충실하지 않으면 열매가 맺히지 않고 받을 상급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허상이 아니라 사랑으로 완성되는 믿음의 실체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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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앉아서 먹는 자와 섬기는 자 중 누가 크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너무 쉬워 보였지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하인이 주인보다 더 크다는 주님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그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주인이나 손님이 집에 들어오면 먼지투성이가 된 발을 씻어주는 것은 그 집의 하인이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8

예수님의 섬김은 당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해 주시는 최고의 경지까지 이르렀습니다. 누군가를 섬긴다(serve)는 것은 내가 당신의 종(servent)이 되겠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여전히 높은 위치에 있기를 고수하면서 남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섬기는 자’의 원어인 디아코노스는 일반적으로 식탁이나 다른 천한 일에 시중드는 사람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과 함께 그 자유로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자유로운 자이나 섬기는 일에는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갈5:13

잘 섬기기 위한 첫 번째 단추는 겸손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지 않고 ‘종’으로서 섬기겠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내가 귀한만큼 상대방도 존귀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마치 종이 주인을 대하듯이 인격적으로 진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두 번째 중요한 점은 나를 위한 섬김이 아니라 남의 필요를 채우는 봉사이어야 합니다. 섬김과 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빠질 수 있는 흔한 오류는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이 하는 일을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만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섬김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의 절실한 필요를 알아 채우는 것입니다.

사람의 깊은 속을 알게 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사람들의 의견에 마음을 열고,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지혜를 훨씬 넘어서는 놀라운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진정한 사랑의 섬김을 가능케 하실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섬김은 상대방의 종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더니, 섬기는 것은 하여도 종이라는 것은 인정하기가 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섬긴다’는 것과 ‘하인(종)’은 같은 어원을 가진 낱말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했습니다. 이걸 보면서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남보다 위에 서있기를 바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겸손으로 치장하며 밝은 미소로 봉사하는 내면에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숨어 있기도 합니다.

Posted by 소겸

삶의 현장에서 독특한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의 역할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연구하고 훈련받고 체득되어 남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독특성을 지니게 되면 그 전문성에 힘이 실리게 됩니다. 이 힘의 균형을 잘 조절하여 그 집단이 하모니를 이루게 하는 것이 리더의 몫입니다. 힘이 막강해질수록 불협화음을 내게 되고 그 전문가가 없어짐으로 공동체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의 한 종류일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가며 지내는 것은 남을 위한 봉사나 배려이기 전에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복을 주시려고 성숙시키시려고 허락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같이 일하는 동료나 나를 찾아오는 고객들에게도 있지만, 그 이전에 먼저 나에게 있으신 것입니다. 같이 일하다 보면 동료가 내게 와서 누구누구와는 맘이 안 맞아서 도저히 일을 못 하겠다고 불평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어려운 상대를 붙여 놓으신 것도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요 은혜를 주시기 위한 수단입니다.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그런 좋은 상황을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도리어 즐길 줄 알아야 하고 이런 일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한 중환자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가족들이 수소문해서 그 병을 잘 고친다는 의사에게 환자를 데려갔습니다. 경험이 많던 의사는 단번에 그 질환을 진단해내고 적절한 치료를 해서 그 환자는 고비를 넘기고 생명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환자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목숨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아니셨더라면 아마 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 이야기를 읽어보면 이 의사가 그 환자의 생명을 건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이 환자가 이 의사가 아닌 다른 의사를 찾아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살았을 수도 있고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 이 의사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입니다. 살아야 할 사람이라면 어떤 의사를 만났어도 살았을 것이고, 죽을 운명이었다면 명의를 만났어도 소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의사를 만났기 때문에 살았다고 100%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소중한 일을 하고서도 ‘나 때문에’라는 수식어를 과감히 버리고 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직업이나 재능은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보면 역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역할은 절대적이지 않아서 내가 아니어도 일은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역할에 대해 논할 때 그것을 타인을 위해 자신이 꼭 필요한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겸손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내가 아니어도 세상은 돌아갑니다.

선교훈련을 다 마치고 선교지에 나가기 바로 직전에 돌이 갓 지난 셋째 아이가 선천성 백내장이라는 병을 진단받았습니다. 부랴부랴 수술을 받게 하고 일 년 동안 보지 못하여 약시가 되어버린 눈의 재활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가기로 했던 방글라데시의 지역 지도자는 우리에게 그곳에는 소아안과가 없으니 다 나은 다음에 선교지로 나오는 게 좋겠다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국에 정착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고, 근무할 여러 병원을 알아보던 중에 예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다시 와줄 수 있겠냐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 일은 엄밀히 말하면 외과 전문의의 일은 아니었지만, 내게 주어진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해 나갔습니다. 동료들은 하나님이 내게 이 일을 감당케 하시려고 선교를 못 나가게 막으신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언젠가 다시 이 직장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을 때 이 일들을 누가 대신할 수 있을까를 걱정하면서, 떠나야 할 때임에도 못 떠나고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내가 없어도 잘만 돌아갈 것입니다. 내가 그들을 위해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이 나의 유익을 위해 이곳에 두셨다고 깨달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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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