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구속(Redemption)2020. 3. 17. 12:05

구원에는 의화(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 영화(Glorifi- cation) 의 세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의화는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을 말하고 영화는 마지막 날에 거룩한 몸으로 부활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는 상황을 말합니다. 의화도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구원의 과정은 성화의 단계입니다.

성화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구원의 과정이며 창조-타락-구속- 완성의 네 개의 축 중에 구속에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성화를 이루는 일은 우리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자기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며 모든 피조물을 구속의 영역 아래 갖다 두는 일련의 과정 전부를 포함합니다. 이는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을 닮아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어그러진 세상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조금씩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회복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모든 과정을 성화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또한 구원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은 죄 된 것을 하나하나 없애고 주님의 것으로 채워가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주 만물의 구속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세상을 구하시는 프로젝트는 점진적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예/아니요’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지금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실망하거나 좌절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더 힘을 내어서 한 걸음 더 완성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디는 모습이 있어야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거룩한 것과 아직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원한 나라가 완성될 그 날에는 모든 것이 거룩한 것으로 변할 것입니다. 피조계를 구속의 연속선상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인침을 받고 구속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의과 대학 시절 국방과학연구소에 근무하시는 김재묵 박사님이 매주 학교에 오셔서 성경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은 미국 유학 중 무디 성경신학교에서 배워 오신 기독교의 진리를 쉽게 풀어서 알려주셨는데, 그런 분께 성경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구원론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셨는데 그때 처음 구원의 세 단계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을 일회적인 사건으로만 이해하고 있다가 성화의 개념을 알게 됨으로써 신앙 성숙의 큰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힘들지만, 왜 내게 꼭 필요한지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부족한 자를 위해 때에 따라 적당한 분들을 보내주셔서 좋을 꼴을 먹게 하신 주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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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속(Redemption)2020. 3. 17. 12:04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직업이 존재합니다. 그중에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도 있고 피하는 것도 있습니다. 직업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결정되고 그 격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습니다. 2008년 우리나라 청소년 통계에 의하면 대학 진학의 가장 큰 이유는 좋은 직장을 얻으려는 것이었으며(50.9%) 그 이유로는 적성과 흥미가 32.7%였고 수입과 안정성을 답한 사람은 41%였습니다. 이처럼 대개의 사람은 좋은 직장에서 일하기를 원합니다.

좋은 자격조건을 쌓아서 쉽게 들어갈 수 없는 좋은 직장에 남보란 듯이 들어간 사람은 우월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듯이 어떤 직업을 갖든지 그 직업이 귀한 것이 되게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요즘 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덕에 여기저기서 동창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동창회에 나가보면 어린 시절 친구로 지냈었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쉽게 친해집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소위 잘 된 친구들 모습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 나는 이게 뭔가 하고 푸념하기도 합니다.

내가 올바른 시각을 갖고 있다면 어떤 직업의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지를 이해하고 실제로 상대방을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습니다. 이 복잡한 세상에 너무 다양한 직업들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은 나름의 역할과 의미가 있습니다.

직업을 신앙과 연결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대부분 교회에서는 직업을 거룩한 일과 크게 나뉘는 세속적인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은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최고의 가치를 갖게 만드는 방법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구속의 과정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이 일이 수단이 되기보다는 자체가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나 도구 이상의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도 하나님의 창조 영역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을 구속 시키는 일은 매 순간 일어나야 합니다. 단순히 돈벌이나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복음이 나타나야 합니다. 성화되어 거룩해져 가는 우리의 일을 목격하게 되는 순간 그 일은 더는 세속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일을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시키십시오. 수많은 미그리스도인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나를 찾아오는 환자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치료의 주인공이 의사가 아니라 바로 환자 자신입니다.’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병원에서는 마치 의사가 환자의 병을 고친다고 생각하겠지만, 정착 병을 고치려 들면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상처를 똑같이 꿰매놓아도 어떤 사람은 잘 붙지만, 어떤 사람은 합병증이 생깁니다. 다양한 원인을 분석하기는 하지만 그 모두를 설명하기엔 역부족입니다. 내공이 쌓일수록 의사라는 직업이 하나님이 하시는 치유의 과정과 회복시켜주심이 없이는 아무 쓸 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겸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의료행위에 대해 더 많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을수록 더 훌륭한 의사가 될 것입니다.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를 돌보는 일에는 의사인 나보다 하나님이 더 전문가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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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속(Redemption)2020. 3. 17. 12:03

하나님의 우주적인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체들입니다. 그 교회에서 우리는 각자 어느 사람도 같지 않은 나만의 고유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약하게 보이는 지체는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의기소침해 할 수 있고 강하게 보이는 지체는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요성은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지체가 하나같이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깨진 유리구슬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아주 아름답게 빚어진 커다란 유리구슬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이 소중한 구슬을 만든 주인은 세기조차 어려운 유리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워 맞추기 시작하였습니다. 밤을 새워가며 여러 날을 수고한 끝에 처음에 만들었던 것과 흡사하게 거의 다 맞추었는데 마지막 한 조각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한 조각을 찾기 위해 여러 날을 더 수고한 끝에 결국 그것을 찾았고 마지막 한 조각을 그 자리에 밀어 넣는 순간 유리구슬이 완벽한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그 작은 구슬 조각 하나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한 조각이 없어 그 구슬 전체가 불완전한 작품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는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고전12:22

내 몸에서 새끼손가락 한 개가 없다면 다른 부분이 아무리 온전하여도 나는 장애인이 됩니다. 작고 약하게 보이는 것이지만 그것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불완전하게 만드는 요소가 됩니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모든 지체를 소중히 여겨야합니다. 당신이 있으므로 주님의 교회가 더 아름답게 서가고 있다고 축복해야 합니다.

저기서 누가 걸어오고 있으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방법은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교회에 수많은 지체가 있지만, 손이나 발을 보고 사람을 알아보지 않듯이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교회인 줄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훌륭한 지체라 해도 머리 되신 예수님을 빼고서는 나의 존재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저를 가르쳐주신 형이 어느 날 교회의 지체 개념을 설명하면서 엄지로 귀를 파는 흉내를 냈습니다. 새끼손가락이 비록 미미해 보이지만, 귓구멍을 팔 때는 더 유용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웃으면서 이야기를 들었지만, 작다고 무시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끼손가락 하나가 없어도 장애인인데, 하물며 하나님이 예수님의 핏값으로 사신 주의 성도들은 교회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일까요? 주안에서 한 형제 된 믿음의 가족들을 사랑하고 섬길 일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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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속(Redemption)2020. 3. 17. 12:03

살아 있는 사람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센병을 앓는 병자가 손발 가락이 손상을 받는 이유는 말초 신경의 손상으로 감각이 무뎌져서 통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겪고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을 가질 만큼 큰 어려움에 부닥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유익한 것이며 도리어 나를 유익하게 하시려고 그것들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넘어질 수는 있지만, 땅바닥에 엎드러지게는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거의 바닥을 친 것 같고 더는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아 막막해할 때 이 시편 말씀을 떠올려봅시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37:24

우리를 붙드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아주 큰 어려움을 당하고 계셨는데 의연하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죽어봤자 천국인데 그것보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나겠어?”

많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위협을 느끼고 있었는데 자신이 처한 상황이 그렇게 절망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고난은 자신의 죄에 대한 결과로 나타나기도 하고 하나님의 시험으로 허락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고난이든 그 일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잘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질병이나 직장 내에서의 갈등, 가정불화 등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감사가 사라지고 마음은 평온함을 잃게 마련입니다. 고통 가운데 처한 성도들은 하나님께 더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특히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했어도 일이 진척이 없거나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자포자기하고 싶은 심정일 때 기도가 더 간절해집니다.

주님이 우리 삶의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최고의 사랑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나중에 돌아보면 그런 과정이 얼마나 유익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보시는 주님은 그 일의 해결 과정에 개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일을 통해 우리와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겪는 어려움이 우리의 미련함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길 기도해야 합니다. 이 어려움이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고 지고 가는 십자가로 표현된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의 미련함이 자초한 일이 아니라면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주님을 따르는 길로 인식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성도라 하면서 어찌 주님의 십자가가 내 삶에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의예과 2학년 여름 의대 기독 학생 수련회는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여수 애양원에서 열렸습니다. 순서 중에 그곳에서 살고 계신 환자분들이 아름다운 찬양도 해주시고 간증도 해주셨습니다. 그분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메시지는 ‘고통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한센병을 앓는 환자들은 난로에 손을 대도 뜨거운 줄을 모릅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더 큰 믿음의 분량을 자라가며 아버지께 기쁜 자녀가 되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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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속(Redemption)2020. 3. 17. 12:02

아담과 하와가 벗었음을 인지하고 두려워하여 숨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가죽옷은 그들이 엮어 입은 무화과 나뭇잎 치마와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한 첫 번째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희생이 있었듯이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많은 부분을 회개하고 고쳐나가기 위해 희생을 해야 합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9:22

그 희생을 다른 곳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먼저 드려야 합니다. 내가 희생제물이 된다는 것은 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죽은 만큼 나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이 살아나십니다. 자기 죽음은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을 얻기 위한 필수적 단계로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어렵게 얻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서 잡으려는 순간 하나님이 그 손을 막으시고 이삭 대신에 수풀에 걸린 숫양을 준비하셔서 번제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아브라함에게도 모리야산으로 가는 3일 길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며 마치 자신이 죽는 것 이상의 심한 괴로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런 아픔 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위해 각 집의 처음 난 것을 치는 무서운 재앙을 내릴 때 각 집의 장자가 죽음을 피하는 방법은 어린 숫양을 잡아 그 피를 그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내 집의 문설주에 발라진 어린 양의 피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OO교회 교인이라는 명패 하나가 그 피를 드러내긴 역부족일 것입니다. 그 피를 바르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고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다시피 하며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피를 흘려주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그 피가 증표가 됨을 나타내는 일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으니 이젠 우리가 주를 위해 죽을 차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아프가니스탄에 단기 봉사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북쪽의 시골 마을이었는데, 현지인들이 우리를 대접하기 위해 양을 잡는 장면을 보여준 주었습니다. 그 양은 몇 번 발버둥 치는가 싶더니 큰 소리도 내지 않고 금방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습니다. 땅바닥에 흘러내려 고인 붉은 피를 보며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하나님 어린양의 보혈을 떠올렸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이 제물로 드려진 수송아지의 피를 뿌려 속죄제를 드리듯이 그 피로 나의 죄가 사해지고 생명에 이르게 되는 놀라운 진리를 기억하면서 속으로 흐느껴 울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게 할 내가 가진 피의 흔적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내가 지고 주님 따라갈 십자가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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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속(Redemption)2020. 3. 17. 12:01

기도를 해주려고 기도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요즘은 모든 게 형통해서 특별히 기도할 것이 없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좋은 직장과 집이 있고 자녀들은 다 공부도 잘하고 건강에도 특별한 문제가 없고….’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꼭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리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받으며 어려워하고 있는 사람이 더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일부러 고난에 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당장 반발이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행복하게 잘 살고 싶은데 고난을 겪으라면 반갑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좀 다릅니다. 왜냐하면, 고난 가운데 있으면서도 기쁘고 평안함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우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힘들어해야 하는데 어려울수록 더 차분해지고 의연하게 문제를 풀어나가며 그 표정은 울상이 아니라 기쁜 미소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할 제목이 없을 정도로 평안하다는 것은 도리어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지고 그분을 따라가고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할 징조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도는 할수록 더 구할 제목이 많아지게 되고 어려운 일을 겪을수록 더 큰 어려움이 닥치게 마련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 하나님 앞에 장성한 자녀로 서가는 것입니다.

기독학생회 후배를 만나 식사를 하고 교제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성품도 온화하고 매사에 열심인 친구여서 평소에 내가 참 좋아합니다. ‘요즘 뭐 어려운 일이나 기도 제목 같은 것 있으면 얘기해봐. 형이 기도해줄게.’ 이렇게 물었더니 잘 지내고 있어서 특별히 기도할 만한 제목이 없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고난인데 왜 어려운 일이 없겠냐고 다그치다 보니, 갑자기 선배라고 괜히 생색내는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늘 겸손하고 온유한 그 후배에게 도리어 내가 많이 배워야하는데 말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드러내지 않고 골방에서 진심어린 마음으로 기도해주는 사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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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속(Redemption)2020. 3. 17. 12:00

우리 삶을 십자가를 빼놓고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숙해간다는 것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말합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할례를 받은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 바리새인, 종교적 열심,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라고 소개하면서 이 모든 신뢰할 만한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배설물로 여긴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3:7~8

바울이 자랑한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할 것을 우리에게 명하였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3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 없습니다. 그분이 더 많이 드러나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고난이 있기 마련이며 남들이 보기에 힘들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피해도 될 것을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장성한 분량의 믿음을 가진 자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살아도 될 텐데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미련하다고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부당하게 받는 고난도 성도에게는 유익한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내가 받는 고난은 무엇인가를 늘 되새겨 보면서 내게 지워진 십자가가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대전에 살던 집은 담 안에 꽤 넓은 텃밭이 있었습니다. 보통의 집이라면 정원을 꾸미겠지만, 우리는 그 밭에서 대부분의 음식재료를 얻곤 했습니다. 배추, 무 등을 심어놓은 밭에는 언제나 배추흰나비와 그 애벌레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운이 좋게도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오는 신기한 장면을 몇 번이나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아름다운 나비로 변하듯이 자기 죽음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또한 소생함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조금 모양이 변하는 차원이 아니라 완전히 환골탈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종(種; species)이 바뀌는 정도의 변화일 것입니다. 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경험을 단 한 번에 이뤄지는 일회성의 이벤트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하고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합니다. 고통스럽고 피해가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볼품없는 번데기에서 아름답게 변한 나비를 보듯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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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3 구속(Redemption)2020. 3. 17. 11:59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은 하나도 빠짐없이 방향성을 가집니다. 수많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더라도 또 세워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껴지더라도 궁극적으로 이뤄야 할 인생의 목표는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도 삶 속에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뭔지 모르고 살아가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우리 삶을 인도해 나가시고 계십니다.

그 궁극의 인생 목표는 바로 ‘완성’입니다. 완성은 숨을 다하는 날까지 우리 깊은 중심에서 외쳐야 할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창조의 형상은 완벽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분은 모두가 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가길 바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뤄지는 날 주님이 이루신 참 완성을 경험하며 우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삶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완성’이라는 대 전제를 이루기 위해 지금도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 방향성을 잘 인지하고 그렇게 되도록 우리 또한 항상 애써야 합니다.

어느 토요일에 열리는 벼룩시장에 갔다가 천 조각 짜리 퍼즐을 사온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머리를 맞대고 그 퍼즐을 맞추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고군분투한 끝에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마구 흐트러진 조각들을 찾아 하나하나 제자리에 놓아가는 작업의 끄트머리에는 온전한 작품으로의 완성이라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힘들었지만 각각의 조각이 원래 그렸던 그림의 위치대로 자리를 찾아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뿌듯해졌습니다. 완성의 그 날 창조의 원형을 회복하신 하나님도 그 멋진 그림을 보시면서 흐뭇해하실 것입니다. 지금 뒤죽박죽 얽히고설킨 현실을 보면서 낙망하지 말고 완성의 그 날에 대한 소망의 끈을 결코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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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3 구속(Redemption)2020. 3. 17. 11:58

1.

내 앞에 하얀 도화지 한 장을 가져다 놓고 펜을 듭니다.

한 점을 찍고 펜 꼬리를 돌려 우아한 곡선을 그리다 보니 또 꽃이 그려집니다.

무궁화를 닮기도 했지만 아마 이런 꽃은 세상에 없을 겁니다.

눈을 그윽이 감고 냄새를 맡아봅니다.

진한 잉크 향 저 너머로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누군가 나를 툭 친다면 내 입에서 줄줄 새어나올 말들이 아름다운 향기로 세상을 이롭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2.

달음질하는 선수는 푯대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 눈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옆에서 환호하는 관중을 바라볼 겨를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발바닥에 상처를 입어도 아픈 것조차 느끼질 못합니다.

저 푯대를 넘어서면 달려온 길을 되짚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느 때부터인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각이 밀려오고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끝에 거의 다다랐다는 말로 표현 못 할 마지막에 대한 경각심은 이런 나의 행동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뛰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제가 봐야 할 많은 것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걷습니다. 푯대가 멀어져만 가는 것 같은데, 뛰는 사람보다 더 빨릴 그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3.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서 있습니다.

어두운 밤에 등불을 비추듯이 제가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강한 빛이 비칩니다.

주마등같이 스쳐 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제가 들어야 할 메시지가 적혀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뒤에서도 아우성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가다 말고 고개를 돌려봅니다.

저쪽이 더 급해 보입니다.

안타깝지만 방향을 틀어봅니다.

한참을 이렇게 우왕좌왕하다가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아버렸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울부짖었던 선지자처럼 하늘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길 기도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림자가 없으신 주님처럼 나의 등 뒤에 서 있는 형제에게도 사랑을 베풀 요령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4.

나는 참 존귀합니다.

내가 그렇게 한 게 아니라 그분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얼마나 귀한지 나의 가치가 주님과 방불합니다.

그러나 내세울 만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내 겉모습을 보고 손뼉을 칩니다.

그것을 보면서 내 속은 마치 불에 타는 것 같습니다.

나는 오늘도 골방에서 바닥을 두드리며 대성통곡하고 있습니다.

내가 우는 이유는 내가 아파서가 아닙니다.

온통 가시가 돋친 나를 꼬옥 안으시는 주님의 살과 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5.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더 잘 알게 된다면 실족하고 말 것입니다.

내 목에 매야 할 연자 맷돌을 떠올립니다.

나는 회칠한 무덤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형제들이 나 때문에 주님과 멀어진다면 죽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들과 함께 존재함으로

나는 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더 그분을 알아갈수록 그들은 내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때문에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어요.”

6.

고통스럽습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나를 짓눌러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아름답게 지으신 세상이 타락의 결과로 변해버린 현실 속에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한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깊은 영적 체험을 할수록 숨이 막혀 갑니다.

아바 아버지를 외치셨던 예수님의 절규처럼 심장이 쥐어짜 집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내 안에 들어와 가득해짐을 느낍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사람들의 외치는 소리가 흐릿해지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평안함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나는 거룩한 고통을 누립니다.

감사의 눈물을 흘립니다.

7.

형제의 고난은 나를 괴롭게 만듭니다.

원래부터 우리는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아파할수록 나는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차라리 내가 그 고통을 모두 내게로 채우고 싶다고 기도합니다.

힘들고 지쳐 외로이 쓰러져 있을 때 두 팔을 벌리시고 다가오셔서 안아주시는 주님이 나와 형제의 짐을 덜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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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질문에 대해 각자 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한국 교회에 너무 자연스럽게 쓰이는 성직자, 평신도, 예배당이라는 단어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물론 이 제시된 단어들에 대해 명확한 식견을 가지고 이를 부정할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사람은 별 거부감을 못 느낄 것입니다.

둘째, 당신 앞에 타 종교를 열심히 믿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전도할 것입니까?

독실한 불교 신자를 만난다면 도리어 자신의 신앙이 약해질까 봐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를 만난다면 두려운 존재라는 선입관 때문에 그 그림자라도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나 긍휼을 떠올리기보다는 나와는 다른 부류이며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게 될 것입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호헌 측의 개척교회였습니다. 담임 목사님은 신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시던 교수 출신이셨는데, 학문의 깊이가 깊고 세상을 읽는 심안이 탁월한 분이셨습니다. 십여 년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가장 근본적인 윤리와 규범에 대해서 확실히 훈련을 받았습니다. 남을 배려하고 섬기는 일에 대해 목사님과 교회의 어른들이 많은 것을 보기도 하셨습니다. 한국 보수 교단의 전통적 신앙생활에 대한 기본에 대해서도 많은 교육을 받았는데, 지금 갖게 된 통합적 관점에서 보면 많이 치우진 이분법적인 신앙행위였지만 삶의 기본기를 다질 수 있던 귀한 시기였습니다. 지금 같아서는 그런 교회에 다시 나가기는 어렵겠지만, 인생 여정에 시기별로 꼭 필요한 공동체와 훈련을 베풀어두신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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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의 침몰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어느 위험한 해안에 보잘것없는 인명 구조소가 하나 있었습니다. 말이 구조소이지 인명구조를 위한 것이라야 다 낡아빠진 소형 보트 한 척밖에 없는 허름한 오두막집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몇 안 되는 구조요원들은 헌신적인 봉사를 해서 수많은 사람을 구조해냈습니다. 작고 낡고 허름한 이 구조소는 그래서 점점 유명해져 갔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기서 구조를 받은 몇몇 사람들과 그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재산과 시간을 바쳐 구조사업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척의 신형보트가 새로 구매되고 새로운 구조대원들이 투입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이 구조소도 좀 더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조소에서 일하는 사람 중 일부가 구조소 건물에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구조도 좋지만 구조받은 사람들이 좀 더 안락하게 쉴 수 있는 공간과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많아지면서 이전에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편의성과 안락함에 대해 점점 눈이 띄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연히 구조소는 증·개축을 해나갔고 실내의 모든 시설도 최고급의 자재들로 아름답고 안락하게 가꾸어져 갔습니다. 당연히 상황이 생기면 구조소로 이용되었지만, 나머지 시간에는 점점 사교클럽이 되어 갔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구조소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점점 화려하고 멋있는 옷들로 꾸며대고 있었습니다. 전에 없던 안락함과 편안함에 익숙해져 간 그들은 구조 자체에는 차츰 흥미를 잃어갔습니다. 그러니 구조를 위해서는 또 다른 구조 전문요원들을 고용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발생하여 처참한 모습의 구조된 사람들이 실려 오면 그들이 애써 깔아놓았던 카펫과 아름다운 가구들이 더럽혀지는 것에 자기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지곤 했습니다. 보다 못한 그들은 본 건물 옆에 새로 자그마한 구조소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거기엔 조난당한 사람들, 구조한 사람들만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그 옆의 본 건물에서는 화려한 의상의 회원들이 번쩍번쩍 빛나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잔을 마주치면서 먹고 마시며 춤추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세월이 가면서 그 옆의 자그마한 구조소도 점점 크게 확장돼 갔습니다. 그 구조소 역시 원래의 구조소와 별다를 것 없는 과정을 거쳐 점점 거대하고 웅장하게 그리고 아름답고 멋있게 바뀌었습니다. 그리곤, 그 옆에 또 하나의 별채, 아주 허름한 구조용 구조소를 지어놓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진짜 구조소 역시 똑같은 순서로 변모해가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해안가에는 이렇게 화려하고 큰 집과 그 옆의 자그마한 구조소가 딸린 이상한 형태의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만 가고 있었습니다.
해안에는 여전히 조난당한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고, 그들은 모두 구조소에 실려 오긴 했지만, 그들이 정작 들어갈 수 있는 방은 언제나 작고 낡고 냄새나는, 그래서 춥고 무섭고 배고픈 구조용 구조소일 뿐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현대 교회의 상황을 날카롭게 풍자해 말하는 것입니다. 인명 구조소가 처음 생긴 취지는 사람을 구하기 위함인데 사람들이 그 규모가 커지고 더 체계적이 되면서 도리어 역기능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을 향한 예배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교회를 아름다운 클럽으로 꾸며 사교장을 방불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그 흐름에 휩쓸리다 보니 교회가 교회로서 그 본질적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갈수록 화려해지고 강당, 카페, 피트니스 센터 등의 문화 공간을 갖는 교회의 모습이 반드시 부정적이지는 않지만 이런 좋은 시스템들이 부작용을 낳고 있다면 그 본연의 역할에 대해서 재고해보아야 하고 소수의 사람만이라도 다시 제대로 된 인명 구조소를 하자는 외침이 나와야만 합니다.

신도시에 새로 생긴 교회에서 그 당시 내가 좋아하던 찬양사역자를 모시고 집회를 한다기에 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그리 크지 않고 아담했는데 안에 들어가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교회라기보다는 소극장에 왔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계단식 의자와 현란한 각종 조명장치 그리고 심장을 울리는 엄청난 음향시설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지역주민을 위해 그 공간을 개방하고 문화 사역을 하겠다는 좋은 계획도 갖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렇게 변하는 것이 좋고 나쁜 것을 떠나서 교회가 가져야 할 본질을 잊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어떤 학자가 세상에서 경험할 고통과 연속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경험하는 삶이 주일이 아닌 평일에도 교회가 아닌 삶의 터전에도 똑같이 나타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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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이러한 문제들을 갖게 된 원인을 몇 가지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신학교의 신학교육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될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삶 자체가 성경에 기록될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교리를 따질 필요도 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대로 삶에 배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그 삶에서 교리들 뽑아내어 체계화하고 학문으로 집대성하였습니다. 수십 세기에 걸쳐 다듬어지고 확고해진 신학은 이제 명실상부한 학문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교리들이 삶에서 나왔음에도 다시 삶에 반영시키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많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기독교적 가르침에 관하여 바르게 ‘생각’했지만 그들의 삶이 반드시 그들의 신념을 반영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서구의 기독교 신학교에서 이런 편향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학생들은 4년 동안 머릿속에 명제적 진리를 쌓아 올린 다음 실제 사역을 위해 지역 교회로 보냄을 받습니다.

4년 혹은 7년 동안 훈련을 받고 지역 교회에 파송을 받은 목회자들은 그간 배운 학문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수고를 해야 하고 그나마 제대로 못 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 밑에서 배우고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은 나름대로 독특한 신앙의 성격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들이 한국교회의 문제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말하기는 쉽지만, 서로 사랑하며 살기는 어렵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배운 것을 지금은 교리만 남아서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말씀처럼 행함이라면 열매가 없다면 신앙이라는 그 나무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열매를 맺어야 또 다른 나무가 생길 수 있을 텐데, 모양만 나무 모습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하시려는 구원 사역에 도리어 방해가 되는 모양새가 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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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 기독교의 신학은 선교사들에 의해 정립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성향에 따라 교단의 성격이 정해졌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 파송된 선교사들도 파송 국에서 삶과 교리의 편향성을 나타내는 신학교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청교도적 경건주의 신학을 내세웠는데 장로교의 효시가 된 언더우드는 성령운동을 강조하고 복음주의적 신앙을 강조했으며 감리교단의 아펜젤러는 복음의 구원하는 능력, 사죄에 대한 확신과 감격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제대로 된 한국적 신학의 기반이 부족하고 사회참여를 지양하는 교회의 분위기는 정숙주의 신앙을 강조했고 지역 사회에 대한 영향보다는 개인 영혼구원에 치중하였습니다. 또한, 한국 고유의 샤머니즘적 신비주의와 묘한 일치를 이루어 서구의 교회가 국가적 교회적 공동체적 개념인데 반해 한국 교회는 개인의 경건주의 신앙으로 흘렀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처음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이던 1984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의 분위기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경건하고 엄숙하였습니다. 예배 전에 웃고 떠드는 것은 물론 옆 사람과 가볍게 대화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교회에서 사용한 악기는 피아노 한 가지뿐이었고 공예배에서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예배당은 구약의 성소같이 여겨져서 하나님이 임재하는 장소로 생각하고 특히 강대상이 있는 단에는 아무나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주로 권사님 한 분이 먼지를 닦으러 올라가시곤 했습니다. 교회에 있는 집기와 모든 물건은 성물이라고 해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훈련받았지만, 전형적인 성속의 이분법적 교회 공동체를 경험하는 기회였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청년부를 다닐 때 이원론의 문제점에 대해서 같이 공부하고 토론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만큼 심각하게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30여 년 전에도 이런 고민을 했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교회의 이런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점점 심해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Posted by 소겸

중세의 교회는 플라톤의 영향 아래 영육이원론을 내세웠습니다. 즉 영혼은 거룩하고 육체는 속되고 더럽다는 개념인데 이것이 기독교에 나타난 이원론의 효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교회는 거룩하고 육체가 거하는 세상은 부정하다는 교회와 세상의 이원론적 구조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속이원론이 체계화되었는데 세상보다 거룩한 곳은 교회이며 교회보다 거룩한 곳은 수도원이라는 생각에 많은 사람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려고 자처해서 수도원을 향했던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사제를 세워 예배를 집전하기 시작했는데 이 영향으로 예배를 위해 구분된 사람들을 성직자라 하고 나머지 일반 대중을 평신도로 나누기 시작하였습니다. 성속이원론의 영향으로 성도들은 세상에 대해 그릇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2:15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요17:18

대부분 성도는 세상의 의미를 교회의 바깥 공간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종료하면서 목사님께서 성도들을 향해 이제 예배가 끝났으니 세상에 보낸다고 선포할 때 대부분 교인은 거룩한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이제 죄로 찌든 직장과 가정 등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 보냄을 받는다고 이해할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거룩한 곳인 교회나 예배당의 바깥 공간이라는 암시를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언급한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사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뿐 아니라 제자들이 사명을 부여받는 사역의 장소로서 ‘세상’을 언급하셨으며 요한은 하나님 나라와 대립한 영역, 사단에 의해 대표되는 집합적인 인격체로 묘사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에 의해 통제를 받는 체제를 가리키며 본질상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합니다. 세상의 성경적 의미는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세속주의적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면 교인들은 ‘세상’이라 부르는 곳을 향해 출발합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열심히 듣고 마음에 굳센 결심을 하고 이번 한 주는 한번 잘해보겠다고 되뇝니다. 집과 직장에 돌아와 보니 교회에서 생각한 것들이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며칠이 지나면 다시 주일을 기다립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좋은 설교도 듣고 마음을 재정비하고 다시 힘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생활을 한다면 일주일 중 하루만 신앙인이 되는 꼴일 것입니다. 교회도 세상에 속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좀 더 쉽게 이분법적 사고에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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